[김영준의 세상읽기] 누가 다이애나에게 돌을 던지랴

다이애나비

나이 차이 13살. 나이는 그렇다 쳐도 살아온 삶의 궤적이 많이 달랐다. 한 명은 전통적인 귀족 가문 출신, 다른 한 사람은 왕족이었다. 그것도 왕위 계승 서열 1위. 어린아이들과 자유분방한 나비처럼 하늘하늘 주변에 호기심 많던 그녀는 높고 견고한 전통과 인습의 성안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래도 15년을 견뎌냈지만, 사랑에 지탱할 힘을 빼앗아 간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또 다른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는 게 사랑이라고 어느 작가는 말했다. 어느 신학자는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라고 무심하게 말한 적이 있다. 여인은 평범한 삶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게 사랑의 전부인 줄 알았다. 비록 짧은 삶을 살았지만 많은 영국인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는 소중한 여인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다이애나 빈(Lady Diana Spencer)’이 그 사람이다.

다이애나비 교통사고

1961년 7월 1일 출생, 1997년 8월 31일 전통과 인습으로부터의 고통을 뒤로한 채 자유를 꿈꾸며 영원히 멀리 날아갔다. 그녀 나이 36세.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에서 왕실에 대한 국민의 의견은 둘로 극명하게 대비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왕이 존재한다는 것도 마뜩찮은 데다 왕실 구성원들도 일반인들처럼 불륜도 저지르고 이혼도 하는 판이니, 자신들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거기에 왕실 운영을 위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지불되고 있으니 단박에 왕실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 진보성향 집단과 급진적인 노동자 계층, 그리고 젊은이들 일부가 이 주장을 펼친다. 정치학자들은 이들을 ‘공화제 주창자’라고 부른다.

다른 견해를 지지하는 집단도 있다. 왕실은 전통적으로 국가의 중심이었고 국민 단결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여왕은 나라의 어른이자 존경의 대상인 바 이들의 존재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영연방 국가들을 묶을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전 세계 입헌군주국의 롤모델이기도 하니 외교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믿는다. 왕실 운영 예산은 이들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이 감당하고도 남을 정도니 괜히 트집 잡지 말라고 점잖게 충고한다. 영국 중산층과 식자 계급들이 이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며 영국을 상징하는 표식이기도 한 왕실은 1천년 넘게 유지되어 오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에 의해 공화정치가 실시되던 1649~1660년에 잠시 중단된 것이 유일한 예외다. 앞으로도 왕실 제도가 오랜 기간 유지될 거라는 점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없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러한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제도의 구축이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견고한 제도 한 가운데에서 다이애나비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명문 귀족 집안의 자제로 1508년 건축된 저택과 넓은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녀는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는 것을 낯설어했다. 다이애나는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와 교사로 일하는 것에 행복해하던 수줍음 타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18세에 친언니인 사라(Sarah)로부터 13살 차이가 나는 찰스 황태자를 소개받은 후 스무 살인 1981년 7월 29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세기의 결혼은 그녀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엄격한 왕실 규칙과 까다로운 예법은 서민적인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으며 게다가 결혼 이전부터 유명했던 찰스의 바람기는 결혼 이후에도 그치지 않아서 그는 옛 애인이었던 이혼녀 카밀라 파커 볼스(Camilla Parker Bowles)와도 여전히 교제하고 있었다.

왕실을 계승할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를 낳았지만,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일상의 공허함은 나날이 커갔고, 그녀는 결국 왕실이 정해 놓은 엄격한 관습의 경계를 넘고 말았다. 1995년 10월 20일 영국 공영방송 BBC와의 인터뷰에서 다이애나는 남편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과 그의 불륜으로 인한 별거 과정, 자신의 부정, 왕실생활로부터의 스트레스, 그로 인한 우울증과 자해 시도, 남편의 왕위 계승 문제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왕실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그녀의 인터뷰를 영국인 2300만명이 참담한 모습으로 지켜봤다.

이 일로 그녀는 왕실과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마침내 엘리자베스 여왕은 두 사람의 이혼을 공식적으로 요구하면서 인터뷰 이듬해인 1996년 다이애나는 찰스와 이혼하고 왕실의 거처인 ‘버킹엄 궁전(Buckingham Palace)’을 나온다. 왕실 근위연대 장교인 제임스 헤위트(James Hewitt)와의 밀애, 영국의 유명 백화점 헤롯의 소유주 아들인 이집트인 도디 파예드(Dodi Al-Fayed)와의 사랑은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전 세계 언론은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에 늘 주목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7년 그녀는 파예드와 프랑스 여행 중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운명의 여신은 지상에서 그녀에게 새로운 행복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녀가 죽은 후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대중의 사랑은 왕실에 대한 애증으로 확산하면서 왕실의 존재와 역할을 두고 다시 여론이 분열되는 현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이애나의 둘째 아들 해리 왕자가 왕실과 결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혼녀이자 혼혈 유색인인 부인 메건 마클(Meghan Markle)에 대한 여론의 지나친 관심과 왕실 구성원의 견제와 비난이 배경이라고 언론은 전한다. 다이애나의 자유분방한 DNA가 아들에게 전해졌는지 모르지만, 왕실의 고루한 규범과 관습은 젊은 해리 부부에게도 그녀가 생전 느끼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찰스와 이혼 후 왕실을 떠났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던 다이애나에 대한 추모와 그리움은 여전히 영국인들의 가슴 속에 넓고 진한 잔영을 남기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장손 윌리엄의 부인 케이트 미들턴(Kate Middleton) 세손빈과 해리의 부인 메건 마클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 다이애나의 패션을 모방하는 등 대중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려 애를 쓴다.

왕세자빈이기에 앞서 진정한 사랑을 꿈꾸며 아이들을 사랑하고 수줍은 미소를 간직한 채 아동, 장애인, 시각장애인, 한센병 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이 많던 다이애나. 그녀는 천국에서 영국 왕실,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 그리고 그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2021년 타계한 시아버지 필립공(Prince Philip), 그리고 뒤 이어 남편을 따라 길을 떠난 엘리자베스 여왕(Queen ElizabethⅡ)과 천상에서 ‘잉글리시 티(English tea)’를 마시며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지내기를 기원한다.

다이애나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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