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세상읽기] 셰익스피어는 줄리엣을 훔쳐왔을까

일본의 저명한 작가가 춘향전을 베껴갔다. 그리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을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기조차 싫다.

중국인들은 우리가 창작하여 세계적인 작품으로 명성이 자자한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운동복에 대한 저작권을 들고 시비다. 그들은 자신들이 축구 종주국이라고 주장했다가 영국과 세계 축구팬들의 면박을 받고 망신 당한 적이 있다. 월드컵이라도 제대로 참가해 보고 그런 말을 하라는 얘기였다. 땅은 넓지만 살고 있는 사람들의 편협한 사고가 문제다.

셰익스피어가 생전에 이탈리아를 여행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그 시대 유럽 귀족들에게 이웃나라를 여행한다는 사실은 마치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같은 큰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이었다.

1818년 태어난 마르크스에게도 그의 세계관의 중심은 유럽이었으니 그보다 앞선 셰익스피어 시대는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그 후 경제적으로 부(富)를 얻게 된 중산층 사람들이 귀족들의 관행을 모방한 것이 오늘날 패키지여행의 기원이 되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1564년 4월 태어난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겐 가슴 아픈 역사인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에 런던 문학계에 등장해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시골 출신인 그에게는 문학적 후원자로 깊은 친분을 나누던 사우샘프턴 백작이 있었다. 그에게서 이탈리아의 베로나(Verona) 지방에 퍼져 있던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일까.

여행을 떠나면서 메모장과 펜을 챙기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곳에서의 일상이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여행지에 도착하면서부터 그들의 촉수는 예민해진다. 낯선 풍경과 사람들, 음식은 물론 바람과 공기의 냄새조차 다르게 느껴지면서 호기심과 기록의 대상이 된다.

포드 브라운 작 ‘로미오와 줄리엣’

자신이 직접 여행하지는 않았더라도 셰익스피어에게는 베로나에서 떠돌던, 서로 원수가 되어 지내는 두 가문의 이야기가 예스럽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몬테규 가문의 로미오(Montague Romeo)와 캐퓰릿 가문의 줄리엣(Capulet Juliet) 이야기다.

척박한 환경에서 사는 민족에게는 창의적 사고가 생존을 위한 무기가 된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성장한 인물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지 모르겠다. 집안이 기울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친 셰익스피어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린 시절 받았던 라틴어와 고전문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글을 썼다. 그런 배경 속에서 자신이 전해 들은 남부 유럽과 북유럽의 흥미 있는 이야기들이 그의 사고를 자극하고 펜을 들게 하지 않았을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리어왕, King Lear>은 고대 영국의 야사 속 일화에서 소재를 얻어 완성한 작품이며, <오셀로, Othello>는 이탈리아 작가 제랄디 친디오가 쓴 ‘백 개의 이야기’ 중 ‘베네치아의 무어인’에서 착안을 했다. <맥베스, Macbeth>는 스코틀랜드의 역사극에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햄릿, Hamlet>은 북유럽에서 전해 내려오는 민화가 창작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는 걸작이 되었다. 그는 이미 16세기 후반 작품들을 통해 세계화를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이뿐만 아니다. 오늘날 비와 바람, 그리고 감자와 당근만 풍성한 영국에 살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후손들은 선대 조상 못지않은 재능을 발휘하며 세계 곳곳에서 소재를 찾아 활용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바탕에는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영국인의 DNA에 흐르는 창의적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낯익은 세계 ‘4대 뮤지컬’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있다. 사실 이는 영국의 예술 거장인 캐머런 매킨토시가 제작한 작품 중 세계적으로 알려진 규모가 큰 4개를 ‘Big Four’라고 호칭했는데, 이것이 한국과 일본처럼 서열 매기는 전통이 강한 국가에서 ‘4대 뮤지컬’로 잘못 알려진 탓이 크다.

어쨌든 4대 뮤지컬로 <캣츠>(1981), <레 미제라블>(1985), <오페라의 유령>(1986)과 <미스 사이공>(1989)을 꼽는다. 캣츠는 미국 태생으로 영국으로 귀화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T. S. 엘리엇의 시를 현존하는 천재 예술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곡을 붙인 뮤지컬로 유명하다.

오페라의 유령도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한 가스통 르류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웨버가 곡을 썼다. 미스 사이공은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미군 ‘크리스’와 베트남 소녀 ‘킴’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으로 레 미제라블을 처음 만든 프랑스인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와 ‘알랭 부브릴’이 작사와 작곡을 했다.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을 무대화한 <레 미제라블>은 원래는 작가의 모국인 프랑스에서 제작된 뮤지컬이었다. 그러나 흥행 실패로 공연 3개월만에 막을 내린 후 영국인 캐머런 맥킨토시가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와 손을 잡고 새롭게 각색해서 런던의 웨스트엔드(West End) 극장 무대에 올린 것을 계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유럽국가들 사이에서는 전통과 예술작품의 소재에 대한 관대함과 너그러움이 있다. 수많은 전쟁으로 인한 고통과 협력을 통한 성장의 역사를 공유하면서 오늘날 하나의 유럽을 만든 배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만의 가치에 대한 공유 의식이 존재한다.

스스로들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이런 전통이 한국, 일본, 그리고 중국 사이에서 개인이 아닌 정치인들의 편협한 사고로 인한 갈등과 분쟁의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왜 유럽이 진정한 문화강국이며 선진국인지를 느낄 수 있다.

런던 시내에서 식탁 3개가 있는 작은 일본 식당을 직접 운영하던 셰프 오사무 가키자키씨가 어느 날 내게 레 미제라블을 보고 온 감동을 짧지만 간단한 영어로 말해주었다. 그는 1년 전에 예약하고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마침내 공연을 보고 왔다며 흥분이 가시지 않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자수성가형의 그는 상처가 많은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연 내내 손수건이 흠뻑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의 적극적인 추천에 힘입어 나는 공연 당일 취소되는 표를 극장 앞에 앉아 4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가장 저렴한 가격의 표를 구입해 공연을 보았다. 배우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던 극장 맨 위 가장자리는 당시 5파운드쯤이 아니었나 싶다. 1층 맨 앞 로열석은 아니지만 지금도 배우들이 진심을 다해 부르던 노래와 무대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기억에 잔잔하다.

오래 전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베로나에 들른 적이 있었다.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거기에는 줄리엣의 생가라고 알려진 건물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2층 발코니에 줄리엣이 나와 있는 모습이 전부였다. 줄리엣은 발코니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을 찾아오는 전 세계의 로미오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나 덴마크 사람 중에는 왜 셰익스피어가 우리 이야기를 훔쳐 갔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레 미제라블이 런던에서 성황리에 공연되는 현실에 문화적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 중에는 분통이 터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이웃 나라의 천재적 예술가가 자신들의 고전 스토리와 위대한 유산을 빌려서 오히려 세계적인 작품으로 발전시킨 예술성과 노고에 대해 찬사와 경의를 보내고 있다.

요즘 한국인들의 문화적 창의성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BTS는 전 세계적으로 팬덤이 형성되어 있고 오징어 게임의 열풍은 놀랄만하다. 우리 민족이야말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창의성을 바탕으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온 민족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중국과 일본처럼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대는 열악한 여건 속에서 성장한 것이니 가치가 더 돋보인다.

자신들의 전래 이야기를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재주 있는 이웃 덕분에 줄리엣 동상 하나 달랑 만들어 놓고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이 뿌리는 돈을 버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안목을 보면서도 그들에게는 왜 질시와 시샘이 더 큰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셰익스피어처럼. BTS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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