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세상읽기]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윤여정처럼 영어하기

한국 배우 최초이자 아시아 배우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ritish Academy Film Awards, BAFTA)’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씨가 수상소감을 하고 있다.

오래 전 발간되었지만 거의 완벽한 상태의 영어문법책을 우연한 기회에 발견했다. 제목은 <기초영문법>. 책을 펼치다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책은 총 18장으로 288페이지 분량인데 제 1장 ‘품사’와 제2장 ‘문장의 종류’까지만 밑줄을 긋거나 펜으로 중요한 부분을 공부한 흔적이 있을 뿐 나머지는 멀쩡했다. 책의 주인은 21페이지에서 영어를 마친 셈이다. 꼭 나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겸연쩍은 기억의 공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기초영문법

왜 거기까지만 공부를 하다 말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학생인데 학업을 계속하지 못할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여자 친구가 생겨 ‘공부하지 말고 나랑 놀자’라는 꼬임에 넘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초가 너무 쉬워서 종합영어로 간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나이 든 장년, 중년 세대들이 영어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2021년 4월 11일 영국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에서 열린 영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의 수상소감 중 “고상한 척하는 영국인들(snobbish British people)” 발언이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동기부여는 늘 사소한 것으로 시작한다. 해외에 여행을 가서 가이드 도움이 없이 쇼핑하고 길거리 음식도 자유롭게 먹어보고 싶은 욕구가 배경이라고 하니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미 일상의 언어가 된 영어를 뒤늦게 배워보겠다는 중장년들의 심경이 애틋하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니 영어 공부를 독려하는 수많은 유혹적인 홍보문구가 주변에 널려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영어 8주 완성” “영어 한 달 안에 끝내기” 이런 홍보를 비웃듯이 “1주에 영어 마스터” 광고도 보인다.

요즘에야 통번역기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막상 현지에서 급한 일이 닥칠 때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순발력이 필요할 때는 내 입에서 나와야 한다. 경험상 가장 효과적인 학습 방법은 현지에서 6개월이든 혹은 1년이든 살면서 현지의 지역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보는 게 제일인데 어디 여건이 녹녹한가.

나는 단순한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외국에서 영어를 열심히 하면 한국말은 잊어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낮에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밤에 자기 전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가를 또박또박 발음해 보고 비로소 잠들곤 했다. 웃픈 추억이다.

그런데 내 주변에도 희한한 친구들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새벽부터 학원에 가고 또 밤에도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더니 막상 외국에 와서는 한국 신문을 찾아 읽고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보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늘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며 식당에 가서도 비싼 소주를 마셔댔다.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여담이지만 평생 영어를 연구하신 내 외조부는 대학 설립에 기여도 하시고 교수로 또 총장으로 오랜 기간을 봉직하셨다. 그 덕에 대학도 명문대학으로 발전했고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키우셨는데 공교롭게도 어려서부터 당신 제자들이 내 선생이 되신 분들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도 나를 보며 “할아버지는 영어도 잘하시고 늘 공부하시는데 너는 왜 공부를 열심히 안 하냐?”며 놀리시곤 했다. 그때 나는 운동하기를 좋아하는 철없는 학생이었는데 외조부께서 만든 영어사전과 영어 학습서로 공부한 것 치고는 참 부끄러운 수준의 학생이었다.

엉터리 학생이었던 댓가를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서 혹독하게 치렀다. 어느 학기엔가는 수업을 마치며 교수님이 “다음 주는 휴강”이라고 했던 모양이다. 수업을 마칠 때는 늘 시끄럽고 다음 강의실로 이동하려는 학생들이 부산을 떨기 마련이어서 강의실은 요란하다. 나는 그 간단한 말을 놓쳐버렸다. 다음 주 수업시간에 강의실에 홀로 앉아 수업시간이 됐는데도 나타나지 않던 게으른 동급생들을 슬며시 비웃다가 허탈해했다. 이 정도는 애교에 가깝다. 증세를 잘못 설명해 귀한 사랑니를 이란 출신의 의사에게 뽑힌 적이 있는가 하면 갑자기 다쳐 병원에 가서도 제대로 표현을 못해 애꿎게 고생을 한 적이 종종 있었다. 해외로 자유여행을 다니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있을 거다. 오랜만에 발견한 영문법 책이 유쾌하면서도 씁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미나리> 한 장면

가만히 생각해보니 윤여정이 표현하는 영어는 그냥 내뱉듯 던지는 게 아닌가 싶다. 영어학습의 효과는 절박함에 있다. 외국에 살면서 체득한 언어는 그 사람들이 낯설고 말 설은 절박한 상황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가를 대변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낯선 곳에서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들 양육마저 떠안은 그녀는 모성애와 가장이라는 힘들고 모진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살았다. 가장의 영어식 표현인 ‘Head of Family’는 말 그대로 가정의 우두머리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옛날부터 가족의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동굴 밖으로 나가 사냥하러 다니는 게 성인 남자인 가장의 역할인 바 그녀는 말 설은 이국땅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황량한 벌판으로 나가서 힘들게 사냥하며 자식들을 양육하며 살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에게 영어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영어(Survival English)’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익숙하지 않은 말을 한마디라도 해야 아이들이 먹을 식량이 생기니 그녀의 삶은 얼마나 절박했을까. 남편이었던 모씨는 여름 베짱이처럼 노래하는 게 직업이었던 인물이니 개미와 베짱이 버전의 적용이 참으로 절묘하다.

지금도 영어로 된 문헌을 이따금 찾아보거나 해외여행 기회를 엿보며 계획을 짜고 있으니 이래저래 영어는 내 주변을 좀처럼 떠나지 않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책을 보면서 ‘이제는 여유도 생겼으니 다시 차분하게 영어 공부를 해볼까’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는 문법보다는 회화가 중요하다는데 그래도 윤여정만큼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책의 절반쯤인 제9장 ‘동사’까지는 제대로 마쳐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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