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교회는 제도가 되기 직전까지”
사도행전 20장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 20:36-38)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을 합니다. 바닷가에서 눈물 바다를 이뤘습니다. 서로 목을 얼싸안고 울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마지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의 만남이 어땠는지는 헤어질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종종 헤어짐이 반가울 때가 있습니다. 만남이 반갑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헤어짐이 싫은 것은 만남이 그만큼 좋았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들을 마주칩니다. 그러나 그걸 만남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헤어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쳐 지나갔을 뿐입니다.
교회란 만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사건입니다. 만난 만큼이 자기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건물에서 같은 예배 형식을 공유하고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같은 교적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으면 같은 교회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과 인격이 간섭을 일으키고 각자의 인생이 서로에게 얽혀 들어가는 만큼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한 제도 속에 여러 개일 수 있고, 제도와 제도를 넘어서 하나의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란 헤어질 수 있는 공동체입니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나간다’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단입니다. 만나는 것도 주님의 뜻이고, 떠나는 것도 주님의 뜻일 수 있어야 교회가 아닐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주 정리했습니다.
교회가 제도성을 강하게 띄기 시작하면 만나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어렵습니다. 만남과 헤어짐이 제도 속에서는 가입과 탈퇴가 되어버립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최소한의 행정적 제도가 필요는 하겠지만 교회가 제도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야말로 교회의 생동감이 아닐까요?
교회는 ‘제도가 되기 직전까지’라는 한 어른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