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잔소리’에 대하여

통치자가 백성을 믿지 못하는 것, 영화감독이 관객을 믿지 못하는 것,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는 것 모두 ‘기준’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을 아끼라”(<도덕경> 17장)고 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는 것이다.


백성을 못 믿는 통치자, 관객을 못 믿는 감독

동아시아 통치의 전통적 지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현대의 정치적 평화와 그 효과를 위한 영감을 구하기 위해 고대 쪽으로 2,500여 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 보자. 거기에서 중국의 철학자 노자의 얘기를 들어볼 수 있다. 노자는 말한다.

“가장 훌륭한 통치는 아래에서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안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통치자를 친밀하게 느끼며 그 통치자를 찬미한다. 그보다 더 낮은 단계에서는 통치자를 두려워한다. 가장 낮은 단계의 통치는 백성들이 통치자를 비웃는 단계다.”(<도덕경> 17장)

그렇다면 정치는 왜 이렇게 낮은 단계로 점점 퇴화하는가? 그것은 신뢰의 문제 때문이다. 노자는 이 점을 간파했다. “통치자가 백성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 백성도 통치자를 믿지 않게 되었고, 그 불신의 결과로 결국은 백성이 통치자를 두려워하는 단계를 거쳐서 끝내는 통치자를 비웃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최고 단계의 통치에서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 겨우 아는 것은 그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통치자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팔짱 끼고 가만히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과중하게 느낄 통치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가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강하게 무장하여 그것을 백성들에게 반드시 실행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을 하되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기”(<도덕경> 2장) 때문이다. 통치의 주도권이 통치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을 때라야 그려질 수 있는 정치의 풍경이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재미있는 영화가 있고, 재미없는 영화가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관객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다. 즉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의 수준을 믿지 않으면 자신의 의도대로 영화가 읽히지 못할 것을 걱정하게 된다. 그렇게 불안해진 감독은 줄거리 또는 암시를 일일이 설명하는 대사나 장면을 영화 전반에 걸쳐 심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관객이 그 영화 속에 들어와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객이 영화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구성하는 형식이 아니라, 감독의 ‘일방통행’을 구경했다는 느낌만 남을 뿐이다. 관객은 없고 감독만 남는 형국이다. 여기서 관객은 자신의 자발성 보다는 감독의 강압성만 느끼게 될 것이다.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관객에 대한 감독의 불신은 관객의 참여를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관객의 자발성이 차단된 후의 영화는 결국 외면될 것이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만 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기대하는 대로 혹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준대로 백성들이 움직여 줄 것이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뜻만을 강하게 관철하려고 한다. 관객을 믿지 못하는 영화감독처럼 되는 것이다.

통치자가 백성들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통치자가 통치에 대한 혹은 통치의 결과에 대한 강한 이념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을 만들어 내는 원천적인 힘은 바로 강한 기준이다. 그 기준은 대개 관념이나 이념의 덩어리일 뿐이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다. 강한 기준과 이념을 근거로 한 통치는 이념으로 실제를 제어하려는 꼴이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대개 부모의 ‘선의(善意)’ 때문이다. 자식을 잘 되게 하려고 부모가 선의로 요구하는 일들이 자식의 성향과 맞지 않을 때, 부모는 자식을 불신하고 자식은 부모를 폭력적인 부모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선의로 가지는 기대와 희망은 그것이 매우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자식에게는 기준이나 이념이다.

기준이나 이념에 비추어서 거기에 만족스러울 정도로 잘 들어맞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시시콜콜 요구하는 것은 자식이 잘못될까 봐 하는 염려에서 출발한다. 자식이 잘못될까 봐 하는 염려는 아무리 봐도 자식이 미덥지 않은 탓이다.

그럼, 이 불신은 그럼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부모가 가지고 있는 기준 때문이다. 통치자가 백성을 믿지 못하는 것, 영화감독이 관객을 믿지 못하는 것,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는 것 모두 ‘기준’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을 아끼라”(<도덕경> 17장)고 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는 것이다.

‘잔소리’는 통치자가 백성들에게 지켜야 할 것으로 부과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백성들이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영화감독이 ‘잔소리’를 줄인다 것은 자신의 의도를 모두 대사 속에 담지 않는다는 말이다. 관객을 믿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부모가 ‘잔소리’를 줄인다는 것은 이래라저래라 자식에게 함부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역시 자식을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백성을 믿는 통치자는 분명한 이념이나 체계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은 통치자로부터 어떤 중압감도 느끼지 않고 그저 통치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이런 일은 백성들을 신뢰하는 통치자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백성들은 공이 이뤄지고 일이 잘되어도 통치자 덕분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저절로 그렇게 된 것으로 혹은 원래부터 이럴 수 있었던 것 혹은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도덕경> 17장)

출세한 자식들이 부모에게 공을 돌리는 일은 참 아름답다. 하지만 거기에 자식 스스로의 존재적 자각이나 자부심은 자리하기 힘들다. 백성들이 공을 이루고도 그것을 통치자에게 돌리는 일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런 구조 속에서는 백성 스스로의 자발성과 자율성에 대한 동기가 자라나지 못한다.

삶을 이뤄나가는 주도권을 자식에게 돌려 줘라. 자식에게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귀착되도록 해야 한다. 백성들에게 자율(自律)과 자정(自正) 그리고 자정(自定)의 능력과 자부심을 돌려주는 정치를 해야 한다.

바로 통치의 주도권과 동기가 백성들에게서 출발하는 정치이다.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의 통치가 아니겠는가! 노자는 이런 통치구조 속에서라야 모든 일이 잘 다스려지는 무불치(無不治)의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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