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고요’는 정지된 상태 아닌 ‘찰나의 순간'”

“고요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다. 찰나의 순간이다. 운동방향을 달리하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충격이다. 관성적으로 사는 삶의 방향에 대한 성찰, 이것이 고요를 경함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사진은 고요에 잠긴 잔잔한 바다. 그러나 언제든 폭풍우가 닥치고 파도가 거세게 일 수 있다. <사진 이영준 독자>

루쉰이 사망했을 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와 함께 장례를 지냈다. 그때 루쉰의 관을 덮은 천에는 민족혼(民族魂)이라고 쓰여 있었다. 중국인들에게 루쉰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루쉰은 중국인들의 마음속 매우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 루쉰의 사상이나 삶이 중국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아주 지대하다. 

루쉰은 100개가 넘는 필명을 썼다. 그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루쉰이 일본에서 의학 공부를 할 때 강의 시간에 중국인 처형 영상을 보게 됐다. 그런데 그는 함께 공부하던 중국 유학생들이 그것을 너무도 냉정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루쉰은 중국인은 병들었으며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정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시급함을 깨닫고 중국으로 돌아와서 문필 활동과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조금 다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나는 고요를 경험하는 것을 중시한다. 고유를 경험해야만 큰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루쉰이 고요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고요란 무엇일까? 아주 조용한 것,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것, 이것은 고요가 아니다. 고요는 그 사람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충격과도 같다.

골프를 칠 때 백스윙에서 다운스윙으로 내려오면서 방향이 바뀌는 교차점, 이것을 고요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다운스윙의 방향, 속도, 타점 같은 것들이 결정된다. 즉, 구체적인 동작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고요라고 볼 수 있다.

루쉰이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면서 의사가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가 엄청난 각성이 일어나서 방향이 급변했는데, 이는 고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요를 경험하고 그 충격과 탄성으로 전혀 다른 새 사람이 된 것이다.

루쉰은 그냥 살던 대로 살 수도 있었다. 의사가 되고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며 평생 살 수도 있었지만, 고요를 경험하고 각성하여 새 사람이 되었고 죽을 때까지 자기가 해야 할 진실한 소명을 발견했다. 인간은 고요를 통해서만 소명을 발견할 수 있다. 고요를 경험한 그 순간이 이후의 루쉰을 만든 것이다.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 불교에서 말하는 참회도 고요의 한 형태라고 본다. 회심하지 않고, 참회하지 않고는 하느님과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를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 순간을 가져야만 한다. 그 순간이 너무 많을 필요는 없다. 딱 한번이면 된다.

고요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다. 찰나의 순간이다. 운동방향을 달리하는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의 충격이다. 관성적으로 사는 삶의 방향에 대한 성찰, 이것이 고요를 경함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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