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관념에 갇히면 보지 않고 판단한다”

알베르 카뮈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 정도면 우선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하게 넘기기 싫다. 카뮈는 다니엘 디포의 문장을 제사(題詞)로 끌고 와 자신의 작품을 규정한다.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것이다.”

이 문장을 가지고 그는 자기 작품의 내용보다는 그 내용을 담을 형식을 규정한다.

사실 그렇게 특별한 일은 아니다. 이야기의 속성을 가진 문학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미덕이다. 중국의 고대 철학자 장자(莊子)에게서는 우언(寓言)이라는 표현법으로 등장한다. 어떤 것을 그것 자체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전혀 다른 어떤 것에 기대어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습관적 언어에 갇혀 질식해가는 진실을 구출해내기 쉽다.

탁월한 인간들은 이런 일을 유난히 잘하는데, 이것이 ‘은유’다. 은유를 구사하여 진실이 더 잘 드러나게 할수록 철학적이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도 모른 채 문학이라는 간판을 달고 이데올로기를 파는 뻔뻔장이가 된다. 글을 다루는 사람은 이런 지경으로 낮아지지 않으려고 긴장해야 한다. 카뮈는 기본처럼만 보이지만 사실은 핵심이면서 전부인 이것을 지키는 데에 매우 성실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제목 ‘페스트’는 ‘페스트’ 이상을 말하는 수고를 했을 것이겠다. ‘페스트’가 성실하게 보여주려는 ‘페스트’는 무엇인가.

지금도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나 과거에 겪었던 페스트나 모두 강력한 병독으로 인간을 단절시키고 온 세상을 감옥으로 바꿔버린다. ‘페스트’라는 제목이 처음에는 ‘수인들’이 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단절과 감옥이 더 쉽게 받아들여진다. 단절과 감옥은 페스트라는 전염병만이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카뮈는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방식을 사용해서 페스트로 다른 페스트까지를 담아 넓게 말하려 한다.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인생이죠.” 우리네 인생은 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단절된 감옥살이에 쉽게 빠진다.

카뮈는 이 의미에 몰두한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우리 각자는 모두 페스트 보균자여서 스스로 유폐되어 죽어간다. 나를 꼭 가둔 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어떤 곳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모두 페스트다. 정해진 마음, 정치적 진영, 종교적 독선, 편견, 이념, 고정된 관념 등등이 페스트의 얼굴을 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런 것들을 넘어 어디론가 건너가는 활동력을 회복하여 자유를 구가하려는 것이 페스트나 코로나에 맞서서 하는 인간의 투쟁이다. 인간으로 존재하려는 자들이 갖춰야 하는 자격이다.

페스트 표지

카뮈는 ‘페스트’의 제일 앞부분에 죽어가는 쥐들을 등장시키며 그것들에 다르게 반응하는 두 인물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병원을 지키는 수위 미셸과 의사 리유이다. 미셸은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지만, 쥐들이 죽어가는 일을 목격하고도 누가 장난을 친 것이라고 하는 등 줄곧 해왔던 익숙한 방식으로 자기 편하게 해석해버린다. 정해진 관념의 지배를 쉽게 받아들이고 거기서 익숙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자들은 예민하지 않고 무던하다. 미셸이 그랬다.

반면에 리유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짜 이유를 찾으러 변두리 빈민가까지 헤집는다. 어쩔 수 없다. 페스트나 코로나 속에서 잘 살아남으려면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 긴장해야 한다. 긴장하지 않으면 쉽게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미셸은 자신을 가두는 정해진 마음에서 벗어날 의지가 약했고, 벗어날 의지가 약하다 보니 긴장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출발은 벗어나려는 의지다. 투쟁이다. 이 투쟁적 의지야말로 인간이 왜 인간인지를 말해주는 알파벳이다. “체념하고서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페스트를 용인하는 자에게 게으른 사람이라는 명찰을 하나 더 달아준다.

긴장하지 않고 관념에 갇히면 게으름 피우다 쉽게 죽는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미셸과 리유가 만드는 거리 사이에 존재한다. 성스러운 얼굴을 하고 심한 관념에 갇힌 사람으로는 파늘루 신부가 있다. 신은 관념의 우두머리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에도 그것대로 유익한 점이 있어서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고 여긴다.”

정해진 관념으로 해석하면 병고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자신의 발목을 잡은 정해진 마음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에 있는 유익한 점을 말하고, 자본주의자는 자본주의에 있는 유익한 점을 말한다.

관념은 없고 존재는 존재한다. 봄은 없고 새싹이 돋아나는 사건만 있다. 일반명사인 봄은 관념이며, 새싹이 돋는 사건은 존재다. 게으른 자는 봄을 말하고, 긴장하는 자는 돋아나는 새싹을 살핀다. 게으르거나 눈먼 자들은 봄을 살피느라 새싹을 외면한다.

살피는 것과 외면하는 것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엇박자가 길어지면 인생은 ‘발이 묶인’ 야생마처럼 속절없다. 리유는 페스트를 품고 고통 속에서 죽어간 아이의 곁을 지키다 “어린애들마저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라며 파늘루 신부 앞에서 절규한다. 이는 페스트에 ‘발이 묶인’ 한 인간이 긴장하며 투쟁해서 발을 풀고 성벽을 열겠다는 중요한 선언이다.

보건대를 조직하여 페스트와 투쟁하던 타루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성인(聖人)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리유는 말한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성인과 신은 관념이고 인간은(나는) 존재다. 카뮈는 보건대까지도 조직하여 선을 행하던 타르를 죽이고 리유를 살렸다. 혁명의 깃발을 휘날리느라 삶 속의 자신을 살피지 못하다 눈이 멀어 가는 자들도 있다.

나를 혁명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이, 우리를 혁명하는 데에만 열을 내느라 스스로 갇히는 자들도 있다.

우리는 관념이고, 나는 존재다. 정해진 사랑을 실천하느라, 자신의 사랑을 잃고 “발 묶인 자”들도 있다. “그러나 사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는가.”

신이나 성인의 대리인으로 사는 것은 죽음의 길이고, 구체적 존재인 자신의 주인이 되어 인간의 자격을 갖춰나가는 투쟁에 매진하는 것은 삶의 길이다.

관념에 갇히면 보지 않고 판단한다. 보는 것은 세상이 내게 밀려들어 오도록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는 일이다. 자신을 곧게 세우는 지지대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판단하는 자는 지지대의 지지를 대신 행사한다. 카뮈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한 지지대는 신이었다.

타루가 묻는다. “선생님은 신을 믿으시나요?” 리유가 말한다. “믿지 않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리유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어둠 속에 있고, 거기서 뚜렷이 보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지지대의 역할을 하는 관념의 장치를 포기한 인간은 숙명처럼 어둠의 혼란 속에서 무언가를 뚜렷이 보려고 애쓸 뿐이다. 학습된 죽음의 관념을 말하는 대신, ‘임종하는 자의 숨소리’를 뚜렷이 들으려고 애쓴다. 이것이 페스트와 싸우려는 의지를 가진 긴장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적인 투쟁이다.

세계는 어둠이자 부조리다. 보건대를 조직하여 헌신한 타루도 죽고, 아무 죄 없는 어린애도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리유의 부인도 죽는다. 선한 일을 해도 ‘조리’(條理)의 정점에 있는 신은 살리지 않는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여기서 인간은 “뚜렷이 보려고 애쓸 뿐이다.” 뚜렷이 보려고 애쓰는 일이 전부다. 애써 살펴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성실성”으로 쉼 없이 투쟁한다. 승리의 조짐도 밝고 환하지 않다.

페스트를 옮긴 더러운 쥐가 꼬리를 휘저으며 도시에 나타나자 자유와 해방의 기운도 함께 시작된다. 인간 해방은 관념 덩어리인 신의 찬미에 묻어 있지 않았다. 기쁨은 이 더러운 말에 있었다. “쥐 말이예요,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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