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타조 잡는 법과 인문적 통찰
펭귄과 더불어서 날지 못하는 대표적인 조류, 날지 않고 의연함을 유지하는 새. 뇌의 크기가 눈의 크기보다 작은 새. 이런 타조는 어떻게 잡을까? 타조 사냥을 직접 해본 적은 없지만, 어디서 읽은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은 내가 말하는 사냥 방식이 아닐 가능성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우화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타조를 발견하면, 일단 타조를 쫒기 시작한다. 쫒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계속 쫒아간다. 타조 이 녀석이 지겨울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쫒다 보면 어느 순간에 타조가 자기를 쫒아오는 사냥꾼과 자기 사이에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긴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다가 자기 머리를 처박는다고 한다. 그러면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타조를 그냥 주워 오면 되는 거다. 먼저 돌도끼로 몇 대 치고 잡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게 타조 사냥이다.
타조 사냥 이야기를 들으면서 타조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사냥되는 이야기라고 느꼈다. 우리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거다. 뒤에서 쫓아가는 사냥꾼은 세계라는 역할을 한다. 내 밖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것이 세계다.
세계는 항상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대답을 요구한다. 무엇인가 반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와 나 사이에는 항상 일정한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실 궁극적으로는 세계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이 긴장을 어떻게 관리하는가가 자기 삶의 실질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 긴장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또 어떤 형식으로 반응하는가가 삶의 내용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일상에서의 보통의 삶이라는 것은 대개 이 어찌해 볼 수 없게 느껴지는 긴장에 굴복한다. 그래서 낯섦을 스스로 조장하기보다는 익숙함에 굴복한다. 이념을 돌파하기보다는 이념을 옹위한다. 파격을 시도하기보다는 질서에 순응하는 쪽을 택한다.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스스로 ‘우리’라는 울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래서 타조처럼 이 세계의 진실을 차라리 외면해 버린다. 차라리 사냥꾼을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은 안전하다고 스스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세계의 진실을 대면하다가 스스로 마주하게 될 그 낯선 풍경이 두려운 거다.
그런데 아주 엉뚱한 타조가 있다. 돌연변이로 태어난 이 녀석은 ‘무모한 심장’을 타고난 타조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할아버지 타조도 사냥꾼에 쫒기다 머리를 처박았고, 삼촌 타조도 처박았고, 자기 동네 타조들이 죄다 그렇게 머리를 처박고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무모한 심장’을 가진 어떤 타조가 “젠장! 도대체 뭔지 알고나 죽자” 하면서 사냥꾼 무리를 “홱!”하고 돌아본다.
자신을 질기게 추적해 오는 그 가공할 풍경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타조의 표정을 상상해 보자. 얼마나 놀랍겠는가? 그전에는 상상이나 해봤을까? 이것은 ‘무모한 심장’의 타조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정말 낯선 사건이다. “경이(驚異)!” 바로 그 경이 그 자체다.
이제 이 ‘무모한 심장’을 가진 타조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시각과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철학이 갑자기 시작된 것이다. 철학 교과서들의 시작 부분은 “철학은 경이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들어 있다. 그 이유를 아시겠는가?
그렇다. 돌아봐야 한다.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만들어서 마주한다는 것, 힘든 일이다. 그것이 엄청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해내야 한다. 그래야 ‘경이’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말 하나를 더 붙이고 싶다. ‘용기’라는 말이다. 철학이 경이로움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하지만, 그 경이로움을 생산하는 창조적 계기는 바로 다른 것이 아다. 모든 불안을 이겨내고, 돌아보려고 용을 쓰던 바로 그 힘이다. 그 힘이 바로 용기가 아닐까?
나는 그래서 우리가 인문적 사고를 하는 길로 들어서는 일도 용기와 관련된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힘의 문제다. 이 돌아보는 힘이 없는 사람은 인문적 통찰에 가까이 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