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용기란?…’세상과의 불화를 자초하는 것’
철학자들은 오묘한 어둠 속에서 홀로 밝은 빛을 본 사람들이고 홀로 조화로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다. 홀로 조화로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다 독립적 주체다. 그리고 그 독립적 주체들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기반으로 홀로 서 있기 때문에 예민하다.
지금은 왜 궁금증과 호기심에서 형성된 예민함이 상실되어가는가? 이미 있는 것을 습득하여 확대 심화시키는 일에만 열중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것을 믿고 수용하는 데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배양시키기보다는 주로 생각의 결과들을 숙지시킨다.
철학적 사고는 분명히 전복적이다. 철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얌전하지 않다. 사고의 야성을 놓치지 않는다. 이미 있는 모든 것들에 답답해하고, 스스로 그것들과 불화를 빚는다. 이미 있는 모든 것들이 편안하고 좋아서 얼른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탁월한 단계에 이를 수 없다. 창조적 탁월함은 기존의 것들을 불편하게 느끼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적 사고의 높이를 말했다. 철학적 수준의 사고를 하려면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서야 한다. 그런데 독립적 주체로 우뚝 서면, 기존의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하게 보이는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마주친다. 불안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은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이것을 해소하여 편안함으로 바꾸려 한다. 독립적 주체는 불안을 편안함으로 바꾸려 하지 않고 불안 그대로를 감당한다. 그대로 품어버린다.
우리가 쉽게 믿음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편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믿고, 모든 문제를 그 믿음의 기준으로 해석하면 항상 명료하다. 믿음을 가지면 편안하다. 하지만 믿고 편안하면, 인간은 딱 거기까지다. 믿음의 내용 그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
탁월한 인간은 항상 ‘다음’이나 ‘너머’를 꿈꾼다. 우리가 ‘독립’을 강조하는 이유도 ‘독립’으로만 ‘다음’이나 ‘너머’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이나 ‘너머’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이 힘들어서 편안함을 선택하면, 절대로 ‘다음’이나 ‘너머’를 경험할 수 없다.
이때 불안을 감당하면서 무엇인가를 감행하는 것이 ‘용기’다. 탁월한 높이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불안을 자초하거나 감당한다. 불안을 견디지 못하여 쉽게 믿음에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