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칼럼] 철학이란 무엇인가?
판 자체를 새롭게 벌이려는 시도,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적인 시선은 분명 세상을 바꾸는 힘을 제공한다. 세상 속의 잡다한 변화를 마치 수학자가 ‘수’를 가지고 압축해서 포착해버리듯 철학자는 ‘관념’으로 압축해서 다룬다. 이것은 매우 높은 차원의 지성적 활동이기 때문에 거대한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여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생산한다. 세상에 다른 흐름을 제공하기도 하고 세상을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그런 역할을 했다.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관도 근대를 수학적이고 양적이며 확실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서 근대적 세계관을 인도했다. 포이에르바하의 ‘물질’도 그렇고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그렇다. 철학적인 시선으로 포착한 ‘관념’적 범주들이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또한 공자나 노자가 말한 ‘도道’도 세상을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끌고 가는 역할을 했다.
철학은 이처럼 세계를 바꾼다. 아니면 철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뀌는 세계를 철학적 시선이 가장 앞서 포착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든 아니면 세상의 변화를 높은 차원에서 먼저 인지하든, 철학은 적어도 우리에게 세계의 변화 자체를 인지시키고 거기에 반응하도록 하는 힘을 갖게 한다. 이런 이유로 철학자는 항상 혁명가며 문명의 깃발로 존재한다.
그래서 철학적인 시선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도전이다. 철학적인 삶은 분명 또 하나의 세계를 생성한다. 판 자체를 보기 때문에 새판을 짤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삶은 변화의 맥락에 주도적으로 동참하는 능력이 떨어져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생산하기가 쉽지 않다. 판 자체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새판 짜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기존의 판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삶’ 자체에 대한 인식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이미 정해진 삶의 방식을 답습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남들이 먼저 생산해놓은 것을 따라하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만 한다. 지식의 축적 여부를 떠나 지성적인 높이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가 그 삶의 격을 결정한다. 그 지성의 극처極處에 철학이 있다.
이 극처 주위에 우리가 일상 속에서 접근하기 쉽지 않은 여러 분야들이 상하좌우로 맴돈다. 수학, 예술, 물리학, 문학, 사학… 이런 것들이다. 이런 분야들이 세계를 높은 지성의 위치에서 포착한다. 이들은 세계를 물리적인 원리로 포착하거나 화학적인 연관으로 포착하거나 ‘수’로 포착하거나 ‘관념’으로 포착한다. 포착된 그것들을 ‘형상’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 높이에서 한 결정들이 구현될 때, 대개 창의적이다, 독립적이다, 전략적이다, 선도적이다, 선진적이다, 새롭다, 지배적이다 등등의 평가를 듣는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한다, 복제한다, 종속적이다, 피지배적이다, 전술적이다, 후진적이다, 구태의연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창의적이고 독립적이고 선도적인 일들은 모두 판을 새롭게 짜는 결과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