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만사형통에 중독된 세상

“요셉은 가지가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담장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 가지에 달린 열매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본문 가운데) <사진 브런치 김연지 작가>


잠언 23장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언 24:1)

악하게 살아도 형통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악하게 살아서 형통하면 주변 사람들이 고통스럽습니다.

무엇이 악한 걸까요? 내가 형통하기 위해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의 형통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삶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요셉의 인생이 형통했다고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특이하게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에는 요셉이 형통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있을 때 요셉이 형통했다고 말합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 요셉 덕분에 보디발 집안 전체가 형통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갔을 때, 요셉 덕분에 감옥의 제반 업무가 형통했고, 술 맡은 관원장이 형통함을 입었습니다. 또한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린 덕분에 야곱의 가정 전체가 형통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가지가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였습니다. 그래서 담장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 가지에 달린 열매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 자신의 형통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세상을 삽니다. 우선 내가 형통하고 보는게 중요한 시대입니다. 형통할 수 있다면 좀 악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메시지를 날마다 접하며 삽니다. 그 결과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결국 모두가 고통스러워지는 가운데 나 혼자 그 고통을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하는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악인의 형통이라도 부럽다는 것입니다. 형통 그 자체가 우상화되고 있다는 것 아닐까요? 성경은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시편 34:21) 우리는 우리 각자가 형통하게 사느라 양산해낸 악에 서서히 죽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악인의 형통인데도 그게 부러우면 형통 중독입니다.

그 중독으로부터 풀려나는 유일한 처방으로 잠언은 외경심을 말합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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