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의 렌즈 판소리] 귀명창 추임새 한마디에
여백(餘白)
예술의 오묘한 경계는 오히려 비워놓은 자리에 뜻이 서려 있고, 텅 빈 그 자리에서 수많은 운치가 일어난다. 노자는 말하길, 공(空)이란 크게 쓰임을 위한 비워둠이라 했다.
수레바퀴는 가운데가 비어 있어야 굴러가고, 그릇은 텅 비어야 무언가를 담을 수 있고, 방도 비워놓아야 쓰임이 널널하게 되는 법이다. 있는 것을 이로움으로 삼고, 없는 것을 쓰임으로 삼는다고 했다.
허실과 유무는 바로 소리꾼과 고수와 청중이 상생으로 맞물려가는 자리이다. 소리꾼이 쳐놓은 공백에는 유정한 공백(有情之白)과 무정한 공백(無情之白)이 있다. 그 유정과 무정을 잘 헤아려 추임새를 넣어야 하니, 귀신같은 귀명창이 아니고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귀명창의 추임새 한마디에 소리꾼의 정감은 천지를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러니 귀명창의 호응도에 따라 소리꾼은 절창과 엉망진창의 경계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