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의 시선] 소리가 바위를 뚫다
지리산 달궁에서 공부하며 3년쯤 지나자 산도 친숙해졌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리가 더 나아지질 않고 오히려 나빠진 듯했다. 그때는 아주 심한 슬럼프로 술도 많이 마시고 바깥출입도 잦았다. 내가 지리산으로 독공을 들어가 3년쯤 되던 날의 소회를 적은 글이 있는데, 방황하던 그즈음에 적은 듯싶다.
“요 며칠 새부터 웬일인지 건넛산에서 소쩍새가 밤만 이슥해지면 밤새도록 목 놓아 울어댄다. 저놈의 목구녁은 쉬지도 않고 목구성조차 구성져서 온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울어대는구나. 저 목구녁을 나한테 주면 참말로 좋을 텐디. 아서라 부질없재 뭐. 실컷 울어라. 오죽허면 니도 그리 울겄냐. 그나저나 대체 저놈은 팔뚝만 한 놈이 왜 저렇게 목청이 좋을까? 물어볼 수도 없고 그것 참 묘하네. 오늘이 선암사에서 지리산으로 공부 장소를 옮겨온 지 3년째 되는 날인디, 이놈의 내 목구녁은 오히려 막혀 풀릴 기미는 없고 정녕 이러다 말 것인가? 남들은 석 달 열흘만 해도 아랫배가 든든하네 어쩌고저쩌고 허던디. 나는 요것이 무슨 일일까. 재주가 없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갑갑할까….
요즘 산에는 산색이 참 시원하고 청량하다. 여린 잎새 사이로 살포시 핀 수줍은 꽃들은 흐드러지게 핀 봄꽃보다 더욱 좋고, 산새들도 무진장 바쁘게 돌아다녀 산중이 활기 있어 좋다. 그런디 어쩌자고 요놈의 목청은 기별이 없단 말인가. 겨우내 얼었던 땅도 다 풀려 시절이 좋은디, 내 목구녁은 어쩌자고 아직도 삼동(三冬)이란 말인가. 어제는 공부도 안 되고 마음이 하도 싱숭생숭해서 막걸리 닷 되를 받아 가지고 노각나무 아래 산죽 늘어진 너럭바위에 앉아 고추와 된장을 안주 삼고 바람을 벗 삼아 한 잔 들이키면서 진종일 자빠져 놀았다. 이 산중에 들어온 지가 3년인디 걱정도 되고 근심이 한 덩어리라 심정이 막막했다. 속도 모른 다람쥐들은 떼거리로 이리저리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오두방정을 떨어쌓고, 꼴 보기 싫은 청설모조차 별나게 분주했다. 그냥 바람만 실없이 선선하게 살랑거리재, 이놈의 목구녁은 왜 기별이 없는지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답답한 심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늦은 저녁쯤 되어 폭포로 가서 한바탕 소리를 불러제끼고 물 한 모금 마시려고 돌아서니, 날이면 날마다 어김없이 들락거리는 조그마한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늘 하던 대로 무엇을 잡아먹는지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물이 떨어지는 폭포 사이로 삐져나온 바위 틈새에 날아가 앉아서 가만히 날 쳐다보며 얼굴을 뙤작뙤작거리는 게 아닌가. 마치 ‘너는 뭘 그리 근심허냐, 있는 대로 하면 되지!’ 하고 말이나 하는 듯이, 한참을 앉아서 그러더니 어디론가 다시 포르르르 날아가버렸다. 나는 그 순간 왠지 눈물이 수르르르 나왔다. 그렇다. 남의 눈이 무슨 대수냐. 여기 와서 얼마나 애가 터지게 소리했던가. 여기서 나의 소리를 날이면 날마다 흐르는 저 물과 저놈의 새, 돌과 바위들, 예쁜 다람쥐 가족들, 먼 산에 멧돼지들도 들었을 것이고, 떡갈나무, 고로쇠나무, 진달래, 철쭉, 노각나무, 때죽나무, 산죽, 으름덩굴, 오미자, 못난 저 청설모까지 이 산중에 있는 요것들이 모두 다 내 소리의 청중이 되어 허구한 날 들었을 텐디, 쟈들이 내 속을 다 알아주겄재 하고 생각이 드니, 왠지 모를 눈물이 수르르 흘러내렸다. 옛날 대가들도 이랬을까.
공부란 것이 산 넘어 산이라더니 정말 갈수록 태산이다. 한 10년은 이 산에 썩어부러야 뭔 소식이 있을란가. 인제는 소리가 몸서리난다. 옛사람 시에 이르길, “문인이 재능을 다하지 않을까 하늘이 근심하여 항상 영락케 하여 덤불 속에 있게 했네”라고 쓰였던디, 그럭저럭 세월 따라 지내다 보면 도심이 붙어 소리가 잘되려나? 아니면 겉살이 다 문드러지도록까지 영영 깨치지 못하고 덤불 속에 갇혀 있으려나? 오리무중의 캄캄한 앞길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럴 때라도 이런 고심을 적어놓은 선배들의 글 한 줄이라도 보면 좋을 텐디, 선배 명창들이 남겨놓은 소리 공부에 대한 안내서도 마땅히 없고, 다만 하다 보면 깨친다는 말만 들리니 도대체 얼마나 공부를 하란 말인가. 이놈의 답답한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을 어쩔꼬. 에라이 모르겠다! 그저 동풍이 불면 언젠가는 내게도 봄이 오겠지. 그냥 생긴 대로 맡겨두고 하는 데까지 그냥 해보자! 저놈의 소쩍새는 내가 이리 속 타는 줄도 모르고 그래도 소쩍소쩍 울어대네잉. 그래 실컷 울어라 울어! 밤새도록 피가 나도록 울어라! 그것이라도 니 맘대로 해야제 어쩔 것이냐. 아먼 그라제.“
그 당시의 나의 애타는 심정이 그대로 엿보이는 글이다. 파란만장 없는 세상사가 어디 있겠는가. 부침 많은 세상일이 그렇듯, 소리 길도 평탄하지만은 않다. 모르는 사람들은 소리만 열심히 하면 되지 걱정할 게 뭐 있냐고 하겠지만, 소리는 감정을 다루는 일이다. 그 소리가 진척이 없고 좀처럼 풀리지 않을 때는 자신의 예술적 한계가 여기까지인가 싶어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때는 만사가 귀찮아지고 사는 게 그저 막막해진다.
공부란 원래 처음 단계에선 발전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속도가 빠르지만, 숙련되어갈수록 그 변화의 속도가 더디고 소리도 늘지 않는다. 찬지미견(鑽之彌堅)이다. 아니, 뚫을수록 더 단단한 게 나오니 갈수록 태산이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여유롭게 즐겨야 고비를 넘겨 시원한 너른 풍경을 볼 수 있는데, 막상 그 상황에 이르면 마음을 여유롭게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