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의 소리 집중③] 껍질 하나하나 벗겨내야 찰진 씨알 만나듯

연록의 잎새 사이로 햇살이 재잘거란다. <사진 배일동>

예술에서의 깨달음은 심수(心手)가 상응(相應)한 것이다. 몇 겹으로 포개진 옥수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내어야 찰진 씨알들을 만나듯이, 절차탁마의 노고를 거쳐야 마침내 빛나는 성음을 얻을 수 있다. 노화순청(爐火純靑)은 옛날 도사들이 단약(丹藥)을 만들 때, 화로 안의 불꽃이 순청색으로 나올 때까지 연단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학문이나 예술 등이 완숙한 경지에 이른 것을 비유할 때 쓴다.

연단(煉丹)하는 화로의 불꽃은 온도에 따라 색깔이 다르다고 한다. 500도 이하일 때는 암흑색을 띠 고, 700도가 넘으면 자주색, 800~900도가 되면 붉은 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뀐다고 한다. 1200도가 되면 불 꽃이 하얀색으로 변하고 3000도를 넘어서면 마침내 파란색을 띠는데, 노화순청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또 낮은 온도에서는 온도 상승이 빠르지만 고온으로 갈 수록 더디다고 한다.

소리 공부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을 느끼지만 익숙해진 어느 순간부터는 진척이 더디면서 한계에 다다른다. 진짜 공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고도로 집약시키는 열정과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그때를 잘 넘기면 노화순청의 진정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바로 그 소리를 찾아내기 위해 소리꾼들은 거침없는 폭포 밑에서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다.

사실 소리꾼이 세속을 등지고 여러 해 동안 산속에 묻혀 유방지외자(游方之外者)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방지외자는 아웃사이더다. 아웃사이더는 흔히 세상 사람이 말하는 세속적인 출세보다는 예술의 본질과 궁극을 찾아 기약 없이 떠도는 구도자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아웃사이더들을 보면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하고 활기 넘치는 자기만의 예술을 지니고 있다.

소리꾼들은 대개 소리로 밥을 먹고 살아가야 하는데 때를 놓치면 직장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니, 일찍이 인사이더인 유방지내자(游方之內者)의 삶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노화순청의 성음을 얻기 위해선 고독한 유방지외자의 삶을 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예술의 길이다. 물론 예술가가 평탄한 길을 택하면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서 무난한 예술활동을 하면서 그런대로 풍족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삶으로는 결코 순청의 신묘한 경지를 맛볼 수 없다. 장자는 ‘양생주'(養生主)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못가의 꿩은 열 걸음을 걸어서 모이를 한번 쪼아 먹고 백 걸음을 걷고서 물을 한 번 마시더라도 차라리 천성에 맞게 소요하며 자유롭게 거닐지언정 새장 속에 갇혀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말은 소리꾼 입장에서 볼 때, 몸을 얽매는 온갖 세상사로부터 초연해야 자기만의 성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자연적인 이치이다. 뛰어난 예술을 얻기 위해서는 한때의 편함에 안주하지 않고 아무도 걷지 않는 험준한 모험의 길을 걸어야만 아무도 가보지 못한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소리꾼은 젊어 한 때 철저한 유방지외자의 고독을 겪어야 활연한 소요(逍遙)의 멋을 누릴 수 있다. 그런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당장 눈앞에 놓인 세상 근심일랑 과감히 접어두고, 자기 소리의 영혼을 찾으려는 독공을 해야 한다. 득음의 길은 바로 거기에 도사리고 있으니, 궁벽진 곳으로 가서 소리와 힘껏 싸워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얻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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