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이만수 아저씨,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아시아엔=최선행 충북대병원 교수, 라오스야구국가대표팀 닥터] 2023년 2월 24일 자정이 넘은 시각 라오스 수도 비엔티엔공항에 내렸다. 애초 이름 정도만 알았던 라오스는 이제 내게 익숙한 나라가 되었다. 대구에서 낳고 자란 내게 삼성라이온즈는 내게 ‘나의 팀’이었고 40대 이상의 대구 사람들에게 ‘이만수란 존재’는 삼성라이온즈보다 더 강력한 야구 아이콘이었다. 어린 시절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외치던 4번 타자 이만수와 라오스란 나라에서 40년 뒤에 함께 할 거라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번이 3번째 라오스 방문이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고 했으나 내게 라오스는 오로지 야구만 있었다. 공항에 밤늦게 도착해 숙소로 이동하고 아침 6시 식사 하고 7시에 숙소를 나와 야구장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저녁 6시가 넘어야 숙소로 돌아온다. 그 뒤에 밥을 먹었는지 무엇을 했는지는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차적응보다 힘든 날씨 부적응에 그 피로감은 말로 설명이 안 된다.
이번 제1회 DGB배 대회 이전, 지난 2019년과 2020년 두 차례의 경험을 겪은 터라 아침 7시 일찌감치 야구장으로 출발했다. 2019년 첫해는 야구장이 없어 공설운동장에서 시합을 했고 7시에 도착에서 전날 밤 산책하러 온 강아지 똥을 치우는 것이 첫번째 과제였다. ‘이만수 감독과 개똥을 줍고 있을 줄이야.’ 세상은 참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개똥 줍던 그해의 기억이 새롭다.
개똥을 줍고 난 이만수 감독은 석회가루로 야구장 선긋기를 직접 했다. 초등학교 때 보았던 이름 모를 기계에 흰가루를 넣고 예쁘게 선을 긋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으로 돌아갈래’ 하고 속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 말이야 ‘라오스 야구대회’였지만 사회인야구 수준의 시합이었고 도무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2020년 나는 또 라오스행 비행기를 타고 말았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2021년, 2022년도 연거푸 그랬을 것이다.
2023년 2월 24일 DGB 라오스야구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과거의 ‘찌질했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2020년 갓 지어졌던 야구장이 제법 모습을 갖추었고 관리도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 제1회 국제대회 개최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싶은 정도의 준비된 구장,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는 진행요원들과 선수들···. 4년 전인 2019년 처름 이곳 야구장에 왔을 때 라오스 아이들 학교시험이 있어 준비요원이 없어 물품 넣어둔 방 열쇠가 없어 난감했던 일은 이미 추억 속 이야기였다. 본부 건물도 전보다 정비가 되었고 전광판도 있었다. 투수 불펜 등 있을 건 다 갖춘 구장을 보면서 ‘이만수 깡다구 대단하구나’란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돈이 많으면 라오스 야구장 짓는데 쓰지 말고, 노후나 편안하게 지내시라”는 조언을 몇 년 전 그에게 드렸던 내가 부끄러웠다. 왜 그렇게 야구장을 짓고 싶어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야구라는 시합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야구장이 정말 필요했구나…’
첫 시합인 라오스-베트남 경기가 시작되었다. 야구장을 둘러보며 느낀 첫 번째 감동 직후 바로 두 번째 감동이 밀려왔다. 라오스 선수들이 못 본 사이 엄청 성장해 있었다. 그들의 땀과 노력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들을 지도한 분들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분들의 노력이 선수들 몸 동작에서 절로 느껴져 다가왔다. “어, 이제 야구 좀 하는데~”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즐겁게 공놀이 하는 모습에서도 “우와~”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더 놀란 것은 선수들과 진행요원들의 한국어가 상당히 늘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아이들과 지금의 이 친구들은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친구들인데 말이다.
그렇게 3일간의 시합이 모두 끝났다. 결승전은 라오스와 태국이 겨뤘고 라오스가 패했다. 예선 때보다 많이 긴장해 실력 발휘를 다 못한 게 약간 아쉽기도 했지만 라오스에서 열린 첫 국제대회를 라오스 친구들은 멋지게 마쳤다.
이번 대회에서는 인하대 스포츠과학과 장은욱 교수와 정연창 트레이너가 재능기부로 시합에 참여해 주어 부상자와 시합 전후 선수관리를 해주었다. 얼떨결에 대회 팀닥터라는 자리는 얻었지만 실제로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의문이 컸다. 그래도 대회에 의사가 참여한다는 것에 말 그대로 의미를 두고 덥석 라오스에 온 것이 많이 미안했다.
의사의 역할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팬으로 어릴 적 아빠 손잡고 야구장 갔던 일들이 무척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에게 야구란 힘들 때 위로해 주는 친구, 기쁠 때 그 기쁨에 함께 해 준 친구다. 저 아이들에게도 야구가 좋은 기억이기를… 이런 라오스 야구, 나아가 동남아 야구의 역사적인 현장에 이 아이들이 함께 했다는 경험이 그들 인생에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야구를 좋아하는 많은 분들과 땀 흘리며 함께 했던 3박4일 여정이 한국에 돌아와 찌든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된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도 라오스뿐 아니라 힘들 때는 더욱 야구장을 찾으려 한다.
지금 여든 넘으신 나의 아버지는 40년 전 어린 내 손 잡고 야구장을 찾으신 게 지금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나 하실까? 내 아버지에게 너무나 감사하다. 아버지는 내가 사리판단 못하던 시절, 대구시민구장에 데리고 가셔서 “만수 바보”를 “플레이, 플레이, 이만수~”를 외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만수 아저씨’의 더 많은 꿈이 현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내가 보탤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까이 돕고 싶다. 그리고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자리가 어떤 보약보다 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회 기간, 비록 번듯한 스탠드는 아니지만, 플라스틱 의자가 줄지어 놓인 ‘관중석’에서 박수 치며 응원하던 라오스의 어린 꼬마야구팬들이 ‘40년 후’ 이번 대회를 추억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기쁨을 나누는 날이 올 수 있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