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고약한 주인노릇·비굴한 노예노릇, 인간 특유의 고질병”
*빌레몬서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빌레몬서 1장 14절 새번역)
“십일조 안내면 암 걸린다”고 겁을 주며 강압적으로 자기 말을 듣게 하는 강도같은 사람이 있고, “십일조 하면 100배의 축복을 돌려받는다”며 기복적 보상을 얘기하고 공수표 발행으로 자기 말을 듣게 하는 로비스트도 있습니다.
때로는 상대를 통제하기 위해 친절을 베풀기도 하고, 멘토링과 상담을 기회 삼기도 하고, 사회의 법과 제도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나 중심적으로 사람과 상황을 조정하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는 나의 자기중심적 통제 본능을 철저하게 거스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권위를 이용하여 빌레몬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리고는 빌레몬의 결정을 오히려 바울 자신이 따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떠한 것이든 통제하려는 의도가 담긴 권면, 희생, 친절, 보상 등의 방법은 상대의 머리를 통제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선한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기쁨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해방의 자유와 기쁨은 노예였던 오네시모뿐만이 아니라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통제로부터, 빌레몬은 종을 통제하려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풀려나야 했습니다.
주종관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사람은 종뿐만이 아닙니다. 주인도 주종관계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주인이 먼저 해방되어야 종도 해방됩니다.
인간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역사적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노예를 해방했을지는 몰라도 주인까지 해방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주종관계에 대한 집착은 폐지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인류는 시대에 따라 다른 옷을 입혀놓은 노예제도를 반복적으로 경험할 것입니다. 고약한 주인노릇, 비굴한 노예노릇, 이 버릇은 인간 특유의 고질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로 가지 않고 골고다로 간 까닭은 오직 사랑만이 이 고질병을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서는 사랑이 어떻게 사회적 제도를 뛰어넘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