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세계’와 ‘나’에 대한 탁월한 해석에 이르는 길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사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든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는데 성경은 어떤 믿음이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것인지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바로 그 믿음의 케이스 스터디입니다.”(본문 중에서) 사진은 박노해 시인의 저서 <길>에서.


‘무엇이 실상인가?'(존재와 인식)

*히브리서 10-13장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철학과 예술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까지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인식이 존재를 규정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미술은 실상에서 심상으로, 더 나아가 추상까지 이르렀고, 철학은 존재 자체보다는 존재를 경험하는 인식의 과정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가장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실체를 탐구한다는 과학마저도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인해 관측하는 행위가 존재의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극단적이고 은유적이긴 한데, 우리는 달이 존재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에 달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뇌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뇌가 인식하는 세상을 경험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그의 존재가, 이름이라는 것으로 인식되고 경험될 때 비로소 존재의 의의가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존재의 시대가 저물고 해석의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훨씬 앞서서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와 나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갖게 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인식 속에 만물의 존재가 규정되었습니다(히 11:3).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즉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태초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실재보다 더 확실한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인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이치, 피조세계에 깃든 창조의 흔적을 인류는 근현대에 와서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식론의 칼날을 하나님에게 들이댔고,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도려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자연과 이웃, 나 자신에게까지도 그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사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든 믿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는데 성경은 어떤 믿음이 가장 안심할 수 있는 것인지를 소개하는 책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바로 그 믿음의 케이스 스터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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