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국회의장 이야기⑧] 정부 비판과 견제, 사회통합을 동시에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구내 도로에 빨간 불이 켜진 모습. 빨간 불은 자동차에겐 멈춤을, 보행자에겐 이동을 허락한다.  <연합뉴스>

권위주의 정권의 국회의장은 소속 정당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국회를 운영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국회에서 원내교섭단체들 사이의 갈등이 심해질 때에 문제를 해결하거나 타협을 위한 중재 역할을 하는데 소홀했습니다. 오히려 국회의장이 앞장서서 법안과 의안을 변칙 통과시켜 국회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소속 정당의 편에서 국회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건 국회가 정치의 중심에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어느 국회의원이 국회가 법을 제정하는 입법부(立法府)가 아니라 정부가 만든 법을 통과시켜주는 통법부(通法部)라는 자조까지 했겠습니까?

또한 그 시절에는 국회의장의 정치적 미래가 당 총재를 겸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국회의장이 되는 것도, 국회의장을 마친 뒤 다음 선거에 출마하는 것도 대통령의 마음에 달려 있었기에 국회의장은 대통령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입법부가 행정부에 종속된 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군부를 배경으로 한 집권세력과 독재자는 법적 근거도 없이 제멋대로 국회의 문을 아예 닫아버리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때 국회를 해산시켰고,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으로 국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제10대 국회는 5공헌법을 근거로 해산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두환이 탱크를 동원해 국회를 폐쇄시켰을 때 해산된 셈입니다.

독재자들은 유신헌법 5공헌법 등으로 국회의 힘을 약화시켰고, 허수아비 국회의장을 세우고, 상임위원장을 자신들이 지명하면서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군부권위주의 정권 아래서도 국회는 민주주의를 지켜온 합법적인 투쟁의 터전이었습니다. 야당이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국회였습니다.

야당이 국회에서 불법적 권력행사와 독재의 횡포에 맞서 싸우고, 시민의 빼앗긴 정치적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웠지만 민주주의는 시민의 힘으로 회복되었습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국회를 억눌렀던 권위주의가 물러나고, 헌법적 권능이 회복되었습니다. 여소야대 국회가 되면서 국회는 여당의 일방적인 독주로 얼룩진 과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의회민주주의는 꽃피지 못했습니다. 민선군부정권(노태우 정권)을 거친 뒤에야 국회에서 성장한 민간정치인이 집권을 했지만 국회의장은 여전히 대통령과 소속 정당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국회가 시민이 기대하는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실망한 시민들은 여전히 국회를 불신하고 있습니다.

‘거수기’ ‘정부의 시녀’라는 아름답지 못한 별명이 없어지기는커녕 여기에 ‘식물국회’ ‘방탄국회’라는 부끄러운 별명이 추가되었습니다. 시민들에게 국회는 시민의 대표가 모여 국사를 다루는 ‘민의의 전당’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개인이나 계파, 또는 소속정당의 이익을 위해 싸움이나 일삼는 ‘정쟁의 무대’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국회의장을 대통령을 대신해 국회를 관리하는 대리인으로 간주해 대통령이 지명하던 관행은 사라졌습니다. 당적보유가 금지되어 외형상으로는 정치적 중립성이 강화되었습니다. 대통령이나 당 지도부의 뜻에 따라 국회를 편파적으로 운영하는 사례도 줄어들었습니다. 박관용 의장부터 시작된 차기선거 불출마 관행도 자리 잡았습니다.

김진표 의원이 여당이 아닌 야당이고 법에 규정된 절차는 거쳐야 하지만 최고령에 최다선(직전 국회의장인 박병석 의원을 빼고)이므로 여야가 실질적으로 합의추대하는 모양새를 갖추면 좋겠습니다. 김진표 의장 체제의 국회가 대표기능도, 정부에 대한 비판과 견제 기능도, 사회통합 기능도 제대로 수행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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