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국회의장 이야기⑥] 대통령 박정희에만 충실했던 이효상
“오늘 제1 야당인 신민당 의원의 불참 속에 제7대 국회가 개원되는 슬픈 사실에 대해서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효상 국회의장의 제7대 국회 개회사입니다. 제7대 국회 국회의원은 175명(지역구 131명 전국구 44명)으로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선출되었습니다.
제7대 국회의 전반기 국회의장단 선거는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됐습니다. 7월 10일 개원식에서는 국회의장과 여당 몫의 부의장만 선출했고, 야당 몫의 부의장 선거는 제7대 총선거 1년만인 1968년 6월 7월에 실시되었습니다. 국회의장단 선거가 변칙적으로 실시된 건 제7대 국회 개원식에 야당 의원들이 출석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참석을 거부한 야당 의원들은 개원식 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으면서 6.8선거 무효와 일당 국회 철회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추진하던 민주공화당은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저질렀습니다. ‘막걸리 선거’라는 말이 바로 6.8 총선 때 생겼습니다.
신민당이 발표한 『6.8부정선거 백서』나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중앙과 지방의 관공서, 행정기관, 공안기관, 군부대 등이 총동원돼 선거에 간여했습니다. 향응제공, 매수, 대리투표, 무더기투표, 공개투표 등 온갖 불법이 저질러졌습니다. 유령유권자 만들기, 투표용지 위조, 허위선거인명부 작성, 투표통지표 배부 안하기 등도 횡행했습니다.
광범위한 부정선거로 민주공화당은 개헌선(117석)을 돌파했습니다. 득표율 32.7%의 신민당은 44석(지역구 27 전국구 17)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대중당이 1석을 차지했습니다. 투표율은 76.1%였습니다. 부정선거 비판 여론이 커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공화당 당선자 8명을 제명하는 이른바 ‘6.16 단안’을 내렸지만 비판여론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전 지역구에 대한 선거무효소송과 전국구 당선자를 포함한 모든 당선자에 대한 당선무효소송이 제기됐습니다. 신민당은 당선자들의 의원등록 거부와 등원거부 방침을 밝히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신민당이 제시한 요구조건은 선거 전면부정 시인 사과, 전면 재선거, 선거부정 관련자 인책, 부정방지보장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6.8선거의 타락상에 대해 …. 행정부 책임자로서 미안”하다고 했을 뿐 야당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선거부정 규탄데모가 일어났지만 ‘법에 의한 처리’를 내세워 강경대응을 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서도 조기방학 실시와 30개 대학 148개 고등학교에 휴교조치를 내렸습니다. 국회도 단독으로 열었습니다.
야당이 불참한 반쪽짜리 국회는 국회의장·부의장에 초선으로 제6대 국회 국회의장단이었던 재선의 이효상 의장과 장경순 부의장을 연임시켰습니다. 이 의장은 10월 5일 등원 거부 중인 신민당 의원을 의장직권으로 상임위를 배정한 뒤, 상임위원장 선거를 강행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2개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명했기 때문입니다.
이효상 의장은 “야당의 등원 거부와 여당의 단독강행으로 빚어진 국회의 파행운영을 지양하고 국회정상화를 위해 모종의 대책을 구상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의장은 국정감사와 예산안심의 등을 모두 여당 단독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국회가 조속히 국정심의에 착수해 줄 것을 요망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충실했던 겁니다.
박정희 정권 내내 국회의장도 상임위원장도 대통령이 지명했습니다. 국회 운영도 대통령의 지시대로 이뤄졌습니다. 여기에 앞장선 것이 국회의장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시켜주니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국회를 운영했던 겁니다. 그런 국회의장이 다시는 나오지 않고, 의원들도 대통령의 뜻보다는 시민의 뜻에 맞춰 의정활동을 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