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국회의장 이야기⑦] 유신독재 길목 3선개헌 날치기 통과의 주역
“소수의 의사가 무시되지 않고 다수의 의사가 강행되지 않는 원만한 국회 운영을 위하여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노력하겠다”고 이효상 제7대 국회의장은 국회 개회사에서 밝혔습니다. 그러나 제7대 국회 운영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 의장이 공화당과 박정희 대통령 편에서 ‘소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다수의 의사를 강행’했기 때문입니다.
국회대표권을 갖고 있는 입법부의 수장이었지만 이효상 의장은 철저하게 박정희 대통령과 민주공화당의 이익이라는 관점에 충실했습니다. 이것은 초선이었지만 대통령이 지명하는 바람에 국회의장이 되었던 제6대 국회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4년 4월 22일 국회의장 사임 의사를 밝혔던 일입니다.
사임 의사를 밝힌 건 국무위원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기 때문입니다. 야당이 제출한 김유택 경제기획원 장관과 원용석 무임소장관 해임건의안이 가결되었는데, 공화당 의원 20여명이 찬성했기에 가능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비료와 양곡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었지만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해임건의 찬성은 공화당 내부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날치기 통과라거나 폭력 행위 등이 있었다면 당연히 국회의장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헌법상 보장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고 국회의장이 물러나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입니다. 여당 의원이 야당 제출안에 찬성한 것에 책임을 묻는 것도 이상하지만, 책임을 져야 한다면 공화당 원내총무가 져야할 일입니다.
민주공화당 총재인 박정희 대통령도 원내중심으로 개편하겠다고 밝혔고, 공화당 원내총무단이 개편되었습니다. 이효상 의장의 사임 의사는 국회에서 부결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당내 분규가 가라앉지 않자 이번에는 국회부의장이 나섰습니다. 장경순 부의장이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공직사퇴를 요구했고, 결국 김 의장은 물러났습니다.
대통령의 부하처럼 행동하는 국회의장단에 대한 의원들의 신뢰는 떨어졌습니다. 제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출 때 74.9%의 지지율을 보였던 이 의장은 후반기 국회의장 선출 때는 53.7%로 지지율이 낮아졌습니다. 장경순 부의장도 2차 투표에서 가까스로 선출됐습니다. 자동폐기되었지만 (이효상)의장불신임안이 제출되기도 했습니다.
제6대 국회의장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효상 의장은 제7대 국회 전반기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이 의장에게 기대한 것은 3선 개헌안의 국회통과였을 겁니다. 윤치영 민주공화당 의장서리가 3선 개헌의 필요성을 처음 제기한 건 1969년 1월 17일이지만 그 이전부터 추진되었습니다.
제7대 국회의원 총선(1967.6.8)이 불법 부정 타락선거로 얼룩진 것도 개헌선 확보를 위해서였습니다. 전반기에 이어 제7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연임을 한 이효상 의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기 연임을 허용하는 3선 개헌을 앞장서 이끌었습니다. 야당은 3선개헌을 당을 해산하면서까지 저지하려 했지만 끝내 막지 못했습니다.
야당이 최후의 수단으로 본회의장을 점거하자 이효상 의장은 “야당이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있어서”라는 사유로 제3별관에서 개헌안을 공화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본회의장을 옮기고 야당 의원들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일요일 새벽 2시였습니다. 이에 반발한 야당은 8개월 동안 국회 등원을 거부했습니다.
야당의 출석거부 상황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후반기 상임위원장을 지명했고, 이효상 의장은 바로 다음날 상임위원장 선거를 강행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 의장을 신임했지만 대구시민들은 불신임했습니다.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떨어진 겁니다. 그 뒤 유신체제에서 두 번 더 국회의원을 했지만 국회의장으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