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국회의장 이야기⑩] 중립적인 영국 하원의장, 당파적인 미국 하원의장
영국 의회에서 의장의 정치적 중립은 매우 잘 지켜지고 있는 확립된 전통입니다. 하원의장이 중립적 지위에 서기 위해 당선과 동시에 소속정당을 탈당해 당적을 갖지 않는 것은 법에 규정된 강제조항이 아닙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자신이 사퇴하지 않는 한 현직 의장이 의장직을 유지 수행하는 것도 1835년 이후 뿌리내린 관행입니다.
하원의장은 사회만 볼 뿐 토론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습니다. 의장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건 가부동수일 때 캐스팅보트의 경우밖에 없습니다. 캐스팅보트도 당파성은 완전히 배제하고 확립된 선례에 따라 행사합니다. 의장은 다수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소수를 보호할 책임을 집니다. 규율을 적용하고 의회절차가 잘못 진행되는 것을 바로잡습니다.
하원의장의 임무와 권한은 매우 광범한데 모두 법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관습과 선례에 근거합니다. 하원의장은 지역구에서 다음 선거를 위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의장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한 사례는 없습니다. 의장을 존중해 의장의 선거구에 다른 정당들이 후보를 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원의장은 국왕, 상원, 다른 정치기구들, 시민들에 대해 하원을 대변하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하원의 권위를 보호합니다. 의장은 하원의 일상 활동이 적절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장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하원의 규칙과 실제 활동에 대한 해석을 내립니다. 하원의 절차적 문제에 대해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도 의장의 몫입니다.
하원의장은 의원들의 자유로운 발언권을 보장해 어떤 의견 발표도 막지 않습니다. 지금은 여야 협의로 발언순서가 정해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장이 의원의 발언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재형 제12대 국회의장이 야당 의원의 의사진행발언 신청서 뒷면에 ‘자네는 좀 참게’라고 적어 되돌려줬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재형 의장은 ‘유성환의원 국시론 파동’때는 유 의원의 발언을 막기 위해 마이크를 꺼버리기도 했습니다. 또 김득수 야당의원이 전두환 정권을 “최루탄과 공수부대로 유지되는 폭력공화국”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자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국체를 부인하는 발언”이라며 속기록에서 삭제시켰던 일도 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영연방의 나라들은 국회의장의 기능과 권한이 영국과 비슷하지만 나라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합니다. 호주는 하원의장의 권한이 약합니다. 의장이 소속정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파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당파성이 강하다보니 정권이 바뀌면 당연히 하원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캐나다에서 소속정당으로부터 독립해서 중립을 유지했다고 평가받는 하원의장은 단 한 명뿐입니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하원의장을 세 번 연임했던 루씨앙 라뮈로(Lucien Lamureux)가 중립성을 지킬 수 있었던 건 그가 무소속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인도는 소속정당과 완전히 독립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중립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영국과 달리 미국 하원의장은 소속 정당의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10선(20년) 이상의 의원 경력에 원내대표단 활동을 했던 중진들이 하원의장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의 강력한 정당지도자 역할은 ‘짜르의 지배’라 불릴 정도입니다. 사회만 보는 것이 아니라 투표권도 행사하고 논쟁에 참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장은 처음에는 국회의 대표라기보다는 대통령 지시에 충실한 대리인 정도였습니다. 민주화 이후 조금씩 개선되어 이제는 당적보유도 금지되고, 대통령이나 정당지도부가 국회의장을 지명하지 않습니다. 영국 하원의장처럼 당파성을 떠나 시민의 뜻을 잘 받들고 국회를 제대로 대변하는 국회의장 선출의 좋은 관례로 확고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