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하반기 국회의장②] 소신과 철학 없는 이효상 같은 이는 막아야
국회의장은 대통령에 이어 국가 의전서열 2위로, 입법부의 수장 역할을 합니다. 재적 300명의 대한민국 국회를 대표하며, 말 그대로 국가의 큰 어른입니다. 국회의장은 대권 주자를 제외한다면 국회의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역대 의장도 기라성같은 정치인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국회의장은 이만섭 전 국회의장입니다. 14대와 16대 국회에서 두 번 의장을 지낸 그는 소위 ‘날치기’를 가장 자제한 의장으로, 소신에 따라 여당과 정권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에는 ‘국회의장 당적 보유 금지’ 등의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해 헌정 사상 첫 무당적 국회의장이 돼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비판받고 있는 지금, 제21대 후반기 국회의장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품격은 어떤 것이며 누가 적합한지 몇차례에 걸쳐 살펴봅니다. 제21대 국회 전반기 박병석 국회의장 임기는 5월 29일 끝나게 됩니다. <아시아엔>은 3.9대통령선거 관련 격조 있는 정치평론에 이어 6.1지방선거 전망을 쓰고 있는 손혁재 시사비평가의 제21대 후반기 국회의장의 요건과 전망 등을 짚어봅니다. <편집자>
지금은 국회의장이 2년 재임하고, 국회의장 임기를 마치면 출마하지 않는 것이 관행입니다. 민주화 이전에는 국회의장이 4년씩 재임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국회의장을 마치고 나서도 출마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국회의장을 가장 오래 했던 이효상 의장은 국회의장 임기를 마친 뒤에도 두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이효상 의장은 1963년 12월부터 1971년 6월까지 7년 6개월간 제6대, 제7대 국회의 국회의장이었습니다. 그는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낙선했는데, 만일 당선되었다면 국회의장을 더 오래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총선과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해서 당선되었습니다.
제헌 국회를 예외로 하면 초선으로 국회의장이 된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효상 의장이 정치에 입문한 건 4.19 혁명 직후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1960년이었는데,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8개월만에 정계은퇴를 했습니다. 2년 뒤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정치를 재개했고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초선인데도 국회의장이 됐습니다.
형식은 국회의장을 국회의원들이 뽑는 거지만 실제로는 대통령이 임명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기대에 맞게 이효상 의장은 박 대통령의 독재와 영구집권을 뒷받침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이 의장은 지역감정을 정치에 처음으로 끌어들였다고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애향심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던 겁니다.
1971년 제6대 대통령선거 때 야당 김대중 후보가 뜻밖에 선전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이효상 의장은 “박정희 후보는 신라 임금의 자랑스러운 후손이다. 이제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 이 고장 사람을 천년만의 임금으로 모시자.”,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등 지역감정을 조장했습니다.
1969년 3선개헌안 날치기 통과에도 앞장섰습니다. 여당 공화당이 3선개헌안을 제출하자 야당 신민당은 개헌을 막기 위해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했습니다. 그러자 이효상 의장은 본회의보고를 생략했습니다. 본회의 의결도 통금이 있던 시절임에도 새벽 2시에 여당의원만으로 본회의를 국회 별관에서 열어 17분 만에 통과시켰습니다.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대처럼 행동하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현직 국회의장을 대구시민들은 가차없이 심판했습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이 의장은 40대의 신진욱 야당 후보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이효상 의원이 떨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제8대 국회의장으로 백두진 국무총리를 지명했습니다.
백두진 의장은 이승만 정권에서 제4대 국무총리를 지냈고, 1961년 4.24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나 5.16 쿠데타로 의정활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1967년 제7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전국구로 국회의원에 잇달아 당선되었습니다. 1970년 다시 제10대 국무총리가 되었다가 1971년 전국구 의원으로는 처음 국회의장이 되었습니다.
1972년 유신 체제가 들어서면서 백두진 국회의장이 물러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백두진의 전임 총리였던 정일권을 백두진의 후임으로 제9대 국회의장으로 지명했습니다. 그리고 1979년 제10대 국회의장에 백두진 유정회 대표를 지명했습니다. 야당, 특히 김영삼 의원은 백두진 국회의장 선출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의 꼭두각시 유정회 국회의원이 국회의장이 되어선 안 된다며 투표시 퇴장하기로 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야당 의원들은 불참했고, 원내 지도부만 본회의에 참석해 기권했습니다. 이걸 ‘백두진 파동’이라 부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장을 입법부의 수장으로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수하처럼 생각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