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하반기 국회의장③] 5월 24일 선출, 소신과 철학 갖춘 이는?

국회의사당 앞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져있다. 불통과 무능, 내로남불로 제대로 기능 못하는 요즘의 국회를 상징하는 걸까? <사진=연합뉴스>

 

국회의장은 대통령에 이어 국가 의전서열 2위로, 입법부의 수장 역할을 합니다. 재적 300명의 대한민국 국회를 대표하며, 말 그대로 국가의 큰 어른입니다. 국회의장은 대권 주자를 제외한다면 국회의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역대 의장도 기라성같은 정치인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국회의장은 이만섭 전 국회의장입니다. 14대와 16대 국회에서 두 번 의장을 지낸 그는 소위 ‘날치기’를 가장 자제한 의장으로, 소신에 따라 여당과 정권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때인 2002년에는 ‘국회의장 당적 보유 금지’ 등의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해 헌정 사상 첫 무당적 국회의장이 돼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그 어느 때보다 비판받고 있는 지금, 제21대 후반기 국회의장에게 요구되는 자질과 품격은 어떤 것이며 누가 적합한지 몇차례에 걸쳐 살펴봅니다. 제21대 국회 전반기 박병석 국회의장 임기는 5월 29일 끝나고 앞서 24일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이 후반기 국회의장을 선출할 예정입니다. 이번 의장 선거에는 김진표 이상민 조정식(이상 5선) 의원과 우상호(4선)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아시아엔>은 3.9대통령선거 관련 격조 있는 정치평론에 이어 6.1지방선거 전망을 쓰고 있는 손혁재 시사비평가의 제21대 후반기 국회의장의 요건과 전망 등을 짚어봅니다. <편집자> 

국회의장 직을 임명직처럼 운용한 것은 독재자들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심복을 국회의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승만 초대 국회의장이 대통령이 되면서 신익희 부의장이 그 자리를 승계했습니다. 이 대통령과 신 의장이 모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이고, 신 의장이 이 대통령을 지지했기에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신익희 의장이 이승만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못한다며 반이승만으로 돌아서면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신 의장은 자신이 만든 친이승만 대한국민당을 떠나 한민당과 손잡고 민주국민당을 만들었습니다. 친이세력은 신 의장의 국회의장 연임을 막으려 애썼지만 결선투표까지 치른 끝에 신 의장은 제2대 국회의장이 됐습니다.

제3대 국회에서는 다수당인 집권 자유당의 이기붕 의원이 신익희 의장을 누르고 국회의장이 됐습니다.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자유당은 의원 정수의 56.2%인 114석을 차지했고, 민주국민당은 15석에 그쳤습니다.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3선 연임 개헌이 필요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부터 장악하려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초선임에도 이기붕 의원을 국회의장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인 이 의장은 대통령 지시로 자유당을 만들었고, 대통령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범석 전 국무총리 등 자유당 내 강경파를 약화시키는 데도 앞장선 심복이었습니다. 이 의장은 이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해 장기집권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4사5입개헌 파동(1954.11.27)입니다. 사회였던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파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실질적 책임자였던 이기붕 의장은 승승장구했습니다. 권력의 제2인자로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마침내 제3대 정·부통령선거(1956.5.15)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떨어졌습니다.

낙선했지만 이기붕 의장은 한 달도 안 돼 제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이 의장의 독주에 반발하던 비주류가 조경규 부의장을 의장으로 밀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개입해서 이 의장을 연임시켰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기붕 체제 연장에 그치지 않고 야당 몫이던 부의장 1석까지 자유당이 차지하게 했습니다.

3선은 성공했지만 민심은 이미 이승만 대통령을 떠나 있었습니다. 신익희 후보가 유세 중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정권이 교체됐을 거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민심을 거술러 자유당 1당 독재체제를 강화시켰습니다. 마침내 1960년 이 대통령은 4선에 성공했고, 이기붕 의장은 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1960년 제4대 정·부통령선거는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였고, 성난 민심은 4.19로 이어졌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고, 이기붕 의장은 아들이 쏜 총에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일하게 국회의장에서 대통령이 된 이 대통령은 물러나 하와이로 쫓겨갔습니다. 이 의장은 재임도중 세상을 떠난 유일한 국회의장이 되었습니다.

국회의사당 3층 로텐더홀의 이승만 전 대통령(왼쪽), 신익희 전 국회의장 전신상. 

국회 본관 본회의장 앞에 있는 공간을 ‘로텐더 홀’이라 부릅니다.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건 아니고 둥근 천장이 있는 원형 홀을 가리키는 건축 용어를 그대로 쓴 겁니다. 로텐더 홀에는 4개의 좌대가 있는데, 한국 의회정치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의 동상을 설치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 개의 좌대 위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두 개는 비어 있습니다.

동상의 주인공은 제헌 국회의장인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의장입니다. 신 의장이 의회 발전에 기여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이 대통령 동상을 로텐더홀에 세운 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입니다. 부산정치파동, 2·4보안법파동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 대통령은 국회를 무시하고 국회의원을 탄압했습니다. 국회의장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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