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 선출, 더불어민주당 중도온건파 의원들 ‘주목’

2020년 6월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이낙연 의원 등이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김태년 원내대표의 보고를 듣고 있다. 2년 전 이들의 다짐이 여전히 유효한가?

이만섭은 내가 참으로 좋아한 몇 안 되는 정치인 중 한명이다. 동아일보 기자 선배이기도 했지만, 그의 글 솜씨는 좀 떨어진 편이다. 이만섭이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때 정경부장이 김성열이다. 김성열은 필자가 1986년 동아일보 입사할 때는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김성열이 부장일 때, 특종기사를 제일 많이 물고 오는 기자가 이만섭이었다. 그러나 이만섭은 기사 작성에는 젬병이었다. 김성열은 이만섭이 씩씩거리며 “특종입니다”를 외치면, 바로 내근하는 누군가를 찾았다. 특히 이진희(나중 문화공보부 장관, 서울신문 사장, MBC 사장 역임)가 있으면 무릎을 쳤다. 이진희 기자 글 솜씨가 좋아서다. ‘이진희 집필, 이만섭 특종’이면 그 기사는 베스트 중 베스트였기 때문이다.

이만섭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독재 중단, 민정 이양 관련기사로 육군형무소에서 3개월 옥고를 치른다. 그때 박정희는 이만섭을 눈여겨 보았다. 당차고 붙임성도 있는 이만섭이 철권 통치자의 맘에 들어온 거다.

그것이 바로 ‘기자 이만섭’은 거하고 ‘정치인 이만섭’이 태어난 출발점이다. 이만섭은 박정희의 민족자주와 자립경제, 자주국방에 깊이 동감해 대선 유세에 참여하게 된다. 그 공을 인정받아 6대 국회 때 전국구 의원으로 본격적인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이만섭은 배지를 단 뒤, 박정희가 청와대로 부르면 단 둘이 술잔 기울이며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당 내 야당이 된 거다. 그게 이만섭의 생리에 꼭 맞았다. 그렇게 정치를 배웠다. 어느 사건땐가 청와대 내에서 박 대통령이 이후락 비서실장과 정무수석과 비서관들과 회의를 했다. 뭔가 산통이 깨지는 일이 벌어져 대책이 시급한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참모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에 박통은 고함을 지르며 “만섭이 오라 캐라!” 했다.

이만섭 의원이 도착하자 박 대통령이 “(이 건에 대해) 이 의원은 어떻게 생각해!”라고 다그쳤다. 당근 이만섭은 직언, 쓴소리를 했다. 듣고 있던 박정희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연신 피워 물던 담배 꽁초를 재털이에 비벼 끈 박통의 노기어린 얼굴에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이만섭은 ‘아차! 실수했구나’라고 고개를 숙이고 혼자 생각하는 순간, 그만 꽝 소리가 났다.

얼굴을 들어보니, 박통이 재털이를 벽을 향해 던져 깨진 소리였다. “고정하십시오! 저가 말실수를 했으니 노여움을 푸십시오!” 이만섭이 재롱 떨 듯 익살맞게 박정희를 바라보자 그제사 박정희도 “그래 알았어…”라며 노기를 풀었다.

그렇게 총애를 받은 이만섭이지만 박정희는 얼음장처럼 냉정하게 그를 내쳤다. 1969년 3선개헌 때 실세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해임을 요구했을 때였다. 그때 김성곤 예춘호 등은 남산(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가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고문을 당했다. 카이젤 김성곤은 수염을 뽑히는 수모까지 당하며 모질게 매를 맞았다. 박정희가 총애하던 이만섭은 그런 일까진 당하지 않았지만 이후 8년간 정치공백기를 맞는다.

이만섭은 1984년 11대 국회 때 전두환 면전에서 직선제를 요구하는 강골이었다. 1987년 6.29선언 직전, 전두환·노태우와 연쇄회담을 갖고 또다시 직선제 수용을 설득할 정도였다.

1993년 14대 국회의장 때 청와대가 예산안을 법정기일 12월2일까지 원안 통과를 압박했다. 하지만 국회의장 이만섭은 집요한 권력의 요구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결기를 보여줬다. 소신대로 여야 합의로 예산안은 통과됐다.

그러나 YS(김영삼)와는 불편한 관계로 돌변해 둘 사이의 국회의장 연임 약속은 물거품이 됐다. 2000년 DJ(김대중) 집권 후 두번째 국회의장으로 등용된 새천년민주당 때는 한술 더 떴다. 이만섭 국회의장은 국회법 개정안이 운영위에서 날치기 처리된 것에 분노해 본회의 상정을 거부했다. 게다가 자신은 소신을 지키는 척, 알리바이처럼 해오던 사회권 이양도 거부하며 버텼다.

청와대가 압박하면 꼬리를 내리던 여의도에 비로소 의회주의 맹아가 싹을 틔운 순간이다. 의회주의자 이만섭의 소신이 빛난 역사적 장면이었다. 16대 국회 때 비로소 날치기를 없앴다. 2002년 2월, 국회의장의 당파적 처신을 없애고 중립을 지키도록 당적 보유를 국회법으로 금지했다. 이어 국회의원의 크로스보팅(Cross voting-자유투표제)를 법으로 제도화했다.

이만섭의 이같이 눈부신 정치 역정은 저서 <날치기는 없다>,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에 기록돼있다. 그는 국회의원 후진들의 사표가 됐다.

이만섭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3.1운동 후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한 대륜중학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의 저항시인 이상화의 지사정신이 꿋꿋이 살아 있었다.

지금 거대야당 더불어민주당이 국회의장으로 누구를 뽑을지 심각하게 내홍을 겪고 있다. 5선의 김진표, 이상민, 조정식과 4선의 우상호가 출마했다. 이재명계는 조정식, 친문은 김진표, 그리고 정세균 이낙연계는 방관 태세라고 한다. 국회의장 선출은 종다수로 1차에서 끝난다.

지금과 같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여전히 ‘명파’니 ‘문파’니 하는 계파정치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신과 철학 없는 조정식이나 김진표가 의장이 되면 거야는 6.1지방선거는 물론 1년 10개월 남은 총선에서 참패할 것이 명약관화다. 다수당, 다선의원이 국회의장을 맡는 오랜 관례와 전통을 무시하고 4선의 우상호 의원의 출마도 정상적인 의회정치라면 상상도 못할 처사다.

중도 합리적인 다수의 온건파 의원들이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장애우로 상징성과 정치적 욕심도 덜 한 이상민을 주목하는 까닭이다. 필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2013년 1월 중순 ‘야당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문패로 7회 연재를 했다. 거야가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고, 일자리도 더 만들려는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필자는 지금도 대한민국이 잘 되려면 야당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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