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주의자 이만섭 국회의장 국회에 동상 세워 기리자
국회 본회의장 중앙로비 텅빈 두 좌대 중 한곳에
여야 난투극 현장 ‘로텐더홀’엔 이승만·신익희만
국회 본관 본회의장 앞 중앙로비를 ‘로텐더홀’이라 부른다. 검수완박과 같은 특별한 논란 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여야 간 난투극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로텐더 홀은 사실 ‘로턴다(rotunda)’의 오기(誤記)다. 로턴다는 둥근 돔(Dome) 천장이 있는 원형 홀이나 원형 건물을 의미하는 건축학 용어이다.
중세 중부유럽에서 가장 널리 유행했던 건축 양식 중 하나이다.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로턴다 양식으로 건축됐다. 미국 의사당과 달리 우리 국회의사당은 로턴다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천장은 돔 형태지만 중앙 홀은 사방 40m 정사각형 형태이기 때문이다.
로턴다가 갑자기 로텐더로 둔갑하게 된 까닭을 둘러싼 우스개도 있다. 로턴다 홀에서 주요 쟁점 법안처리 등을 둘러싸고 여야 대치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그래서 ‘로-텐더(law-tender)’, 즉 법안(law)을 부드럽게(tender) 처리하자는 뜻을 작명됐다는 거다.
믿거나 말거나의 우스개이니 크게 개념치 말 일이다. 국회 청사 현관에서 빨간 카펫이 깔린 계단을 따라 로텐더 홀에 들어서면 왼쪽 세종대왕, 오른쪽 이순신 장군이 보인다. 홀 바닥 문양은 신라의 기와와 석굴암 천장, 조선의 띠문, 경북궁 근정전의 꽃살무늬 창을 형상화했다. 시대를 관통하는 통합과 단합의 염원을 상징한다고 한다.
홀 천장에는 300와트 수은등 60개, 200와트 백열등 132개가 돔의 입체감을 살릴 수 있게 배치돼 있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홀 4곳 귀퉁이에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좌대가 놓여 있다. 1975년 의사당 건립 당시 위대한 지도자 동상을 올려놓기 위해 만들어 놓은 거다.
제일 먼저 1996년 ‘석오 이동영’ 선생의 흉상부터 건립돼 비치됐다. 석오 이동영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냈다. 선생은 1919년 3·1 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4월 10일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 된다. 임시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기본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을 이어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했던 거다.
이동영 선생 흉상부터 세운 건 국회의 뿌리가 임시의정원에 있다고 봐서다. 국회 사무처 직원들은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이름을 딴 로턴다, 로텐더보다 ‘중앙 홀’로 부른다. 로텐더 홀에는 4개의 좌대가 있다. 좌대 두 곳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고 두 곳은 아직 비어 있다. 제헌 국회의장인 우남 이승만 대통령과 이어받은 해공 신익희 의장의 동상이다.
해공이야 그렇다 쳐도 우남 동상을 로텐더 홀에 세운 것에 진보좌파 진영은 노골적으로 불쾌해 한다. 부산정치파동, 2·4보안법파동 등에서 드러나듯이 우남은 국회를 무시하고 의원들을 탄압했다는 이유에서다. 초대 국회의장인 우남이 대통령이 되면서 신익희 부의장이 그 자리를 승계했다. 우남과 해공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이었다. 해공이 우남을 지지해 둘 사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신익희 의장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며 反이승만으로 돌아서 갈등이 생겼다.
해공은 자신이 만든 친 이승만 대한국민당을 떠나 한민당과 손잡고 민주국민당을 만든다. 친이는 해공의 의장 연임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다. 결선투표까지 치르는 우여곡절 끝에 해공은 가까스로 제2대 의장에 오를 수 있었다. 제3대 국회에선 다수당인 집권 자유당의 이기붕 의원이 신익희 의장을 누르고 의장이 됐다. 1954년 5월 20일 제3대 총선에서 자유당은 56.2%인 114석을, 민주국민당은 15석에 그쳤다.
장기집권을 위해 3선 연임 개헌이 필요했던 이승만은 국회부터 장악하려 했다. 우남은 초선임에도 이기붕을 의장 자리에 앉히는 무리수를 뒀다. 우남의 비서실장 출신인 이기붕은 자유당을 창당해 2인자의 자릴 굳혔다. 우남과 각을 세운 철기 이범석 등 당내 강경파를 요리할 복심이었다.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해 장기집권 틀 만들기에 골몰했다. 이것이 유명한 4사5입 개헌 파동(1954.11.27)이다.
당시 본회의 사회자이던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파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배후의 실세로 모든 걸 조종했던 이기붕은 우남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확고부동의 권력 2인자를 굳힌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릴 정도였다. 제3대 정·부통령선거(1956.5.15)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신다. 그래도 이기붕은 한 달도 안 돼 제3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 연임에 성공한다.
이기붕의 독주에 반발하던 비주류가 부의장이던 조경규를 의장으로 밀었으나 우남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입했다. 우남은 이기붕 체제 연장에 그치지 않고 야당 몫 부의장 1석까지 자유당이 차지하게 했다. 국회를 손에 넣고, 3선에도 성공했지만 당시 민심은 이미 우남을 떠났다. 해공이 그 유명한 한강 백사장 유세 중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정권이 교체됐을 거라고 한다.
그럼에도 우남은 민심을 거슬러 자유당 1당 독재를 한층 강화시켰다. 마침내 1960년 이 대통령은 4선에도 성공했고,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됐다.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지탄받은 1960년 제4대 정·부통령선거로, 성난 민심의 파도가 배를 뒤집었다. 4·19 혁명의 시발점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고, 이기붕은 양자가 쏜 총에 맞고 세상을 떠났다.
유일하게 국회의장에서 대통령으로 올라 4선 대통령에서 하야해 하와이로 쫓겨갔다. 이기붕은 재임 도중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난 유일한 국회의장으로 기록됐다.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권력의 불빛으로 보고 날아간 커다란 부나방의 비참한 말로였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 중 최루탄을 맞고 숨진 학생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그리고 의기의 도시 마산은 시위대로 뒤덮였다. 그때 동아일보 社旗를 단 취재 차량을 타고 이만섭 동아일보 정치기자는 현장을 발로 뛰며 날렸다.
그 이만섭이 나중에 박정희 최고회의의장과의 애증의 연을 맺고 두 차례 국회의장을 역임하게 된다. 꼿꼿하고 청렴한 이만섭은 세가 없는 단기필마의 외톨이 의회주의자였다. 김형욱과 이후락, 두 권력 실세를 겨냥한 직언은 그를 8년 간 정치를 쉬게 만들었다. 정치역정에서 그가 맛본 시련과 신산은 부단히 이어졌다.
군사독재 정권의 2중대라는 따가운 눈초리를 견뎌내야만 하던 굴곡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이만섭은 국회의장을 두 차례 역임하면서 국회를 청와대의 지배로부터 떼어냈다. 의장은 당적에서 떠나도록 국회법 규정해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런 그의 치적을 기리는 차원에서 로텐더 홀의 두 곳 빈 좌대 중 한 곳에 동상을 세우자!
정의화 전 의장이 나서 이만섭 동상 건립추진위라도 만들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만섭의 의회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 중 으뜸으로 나는 정의화 전 의장을 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