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국회의장 그립다”···’상식’에 바탕한 ‘소신과 기개’ 이만섭

이만섭 국회의장

연세대 사회과학대는 2009년 12월7일, 연희관 401호실을 ‘국회의장 이만섭홀’로 이름짓는 행사를 개최했다. 8선 의원으로 국회의장을 두차례 역임한 故이만섭이 기념 축하연에서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했다. 원로 정치인의 발자취가 모교 강의실에 헌정되어 후진들의 사표로 제시된 장면이다.

당시 이만섭은 모교의 ‘이만섭홀’ 헌정에 “사후에나 검토하자”며 한사코 고사했다. 그러나 학교측 설득과 최문휴 전 국회도서관장, 안대륜 전 국회의원 등 연세대 정외과 후배들까지 앞장서서 강권해 개관하게 됐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때 필화(1961년 민정 이양 관련기사)로 육군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른 게 그의 정치인생의 출발점이다.

직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민족자주와 자립경제, 자주국방에 깊이 동감해 대선 유세에 참여하는 열성 지지자가 된다. 그 공을 인정받아 6대 국회 때 전국구 의원으로 본격적인 의정활동을 시작했다. 초선의원 때 한미 행정협정(SOFA), ‘남북 가족면회소 설치 결의안’을 선보여 기자 출신의 감각을 보여준 바 있다. 1969년 3선 개헌 때 권력 실세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해임을 요구하다 8년간 정치공백기를 맞는다.

1984년 11대 국회때는 한국국민당 대표로서 5공 권력에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강단을 보여 주목을 받았다. 1987년 6.29선언 직전에도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의 연쇄회담에서 직선제 수용을 설득했다. 1993년 14대 국회의장 때 청와대가 새해 예산안을 법정기일인 12월2일까지 원안통과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압박했다. 하지만 강골의 이만섭 의장은 집요한 권력의 요구에 꿋꿋하게 맞섰다. 결국 여야 합의로 예산안을 통과시켰으나 김영삼 대통령과의 불편한 관계가 돼 의장 연임 약속도 수포로 돌아갔다. 

2000년 두번째 의장으로 등용된 새천년민주당 때는 한 술 더 떴다. 이만섭 국회의장은 국회법 개정안이 운영위에서 날치기 처리된 것에 분노해 본회의 상정을 거부하고 사회권 이양도 거부하며 버텼다. 청와대가 압박하면 꼬리를 내리곤 하던 여의도에 비로소 의회주의의 맹아가 싹을 틔운 순간이었다. 의회주의자 이만섭의 소신이 빛난 역사적인 장면이자 이로써 16대 국회부터 날치기를 없앤 기록까지 세운 것이다. 2002년 2월에는 국회의장의 중립을 위해 당적 보유를 국회법으로 금지하고 국회의원의 자유투표제를 제도화했다.

이만섭의 눈부신 정치 역정은 저서 <날치기는 없다>,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에 자세히 기록돼 후진의 사표가 됐다. 이만섭은 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3.1운동 후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한 대륜중학에 들어가면서 강골이 됐다. 이 학교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의 저항시인 이상화의 지사정신이 꿋꿋이 살아 있었다.

교장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 교사는 경북대 대학원장을 역임한 이규동, 10.26의 김재규(체육선생)가 있었다. 김재규는 김천중학교 체육선생으로 근무하다 대륜중으로 옮겼으며 뒤에 육사 2기로 박정희와 함께 임관한 바 있다. 이만섭에게는 기연(奇緣)이요 악연(惡緣)이라고 할 수 있다. 연대 정외과는 언론인 임철규씨(동양통신, 시사저널), 오자복 장군(전 국방장관) 등과 동기이나 6.25 참전으로 흩어졌다.

이만섭은 국민병을 모집하자 파일럿이 되려고 공사 3기생으로 입학했지만 임관 직전 퇴교당해 졸병으로 제대했다. 공사 2학년때 ‘오성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생도대장 역할을 하면서 행정장교와 생도 간 술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학우들을 구하려고 이만섭이 혼자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전시 중 패싸움이라 군법회의에 올라가 당장 퇴교처분 됐다.

당시 공사 교장 등 고위층에서도 이만섭 생도를 살리려고 노력해봤지만 허사였다. 이만섭이 임관했다면 별은 달았을 텐데, 미수에 그쳤기에 정치인으로는 오히려 굵은 발자국을 남기고 대성했다. 이때로부터 48년이 지난 2001년 11월, 공사는 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이만섭의 인생 역정은 초창기에도 가히 질풍노도와 같았다. 사병으로 병역을 마치고 연대에 복교한 뒤 백낙준 총장의 사랑을 받으며 털보 응원단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맞수 고려대와 정기 연고전 때 털보의 역할은 맹렬해 오랫동안 화제로 올랐다.

1956년 反공산주의혁명이 촉발한 헝가리사태 때, 소련 탱크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며 유혈 진압에 나섰다. 이만섭은 정외과 후배들을 찾아가 학도의용군을 조직하자고 선동했다. 유재건 전의원이 용감하게 손을 들고 참가했던 사람들 중 한명이다. 이들이 김용우 당시 국방장관을 찾아가 “헝거리로 보내달라”고 조르자 김 장관이 “용기는 가상하나…”라며 돌려보냈다. 헝거리와 외교관계도 수립되지 않았을 때였다. 대체 무슨 수로 갈 수 있었겠는가? 이만섭의 대학시절은 열혈 청년 그 자체였다.

뒷날 <동화통신>에서 <동아일보>로 일터로 옮긴 뒤 정치부 기자로 취재할 때였다. 4.19혁명 후 자유당 부정선거 책임자들에 대한 구속동의안이 부결되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이만섭이 고함쳤다. “자유당 이 도둑놈 새끼들아!” 본회의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시 국회의장이 “이만섭기자 조용히 하세요!”라고 나무라는 소리까지, 국회 속기록에 그대로 기록돼있다.

민간인의 목소리가 국회 공식기록인 속기록에 기재된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이런 맹렬 이만섭이니 국회 진출 후 공화당에 있으면서 ‘권력 2인자급’ 목을 자르라고 직격했을 터이다. 의장 시절 2002년 3월, 헝거리를 순방한 이만섭에게 십자대훈장을 수여한 것도 학창 시절의 혈기 덕분이다. 이만섭의 회고록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에 정치역정이 자세히 나온다.

<동화통신>과 <동아일보>를 거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 대한 비판 안목으로부터 정치적 동지 사이로 발전한 과정 및 한동안의 정치 공백(8년간, 3선 개헌에 반대하며 이후락 김형욱의 목을 치라고 일갈한 때문)과 그뒤 화려한 의회정치의 주역으로 8선에 두차례 국회의장 역임을 통털어 ‘질풍노도’의 세월이었다. 그 이만섭의 최대의 업적은 날치기를 없애고 국회의장이 당적을 떠나 청와대로부터 독립한 중립적인 위상을 지키게 만든 거였다. 의회주의자 면모에서 이만섭을 따라갈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만섭은 참으로 겁 없이 팔팔하게 맹렬 정치인으로 내달렸다. 그의 대학시절 때부터 온 세월이 질풍노도였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