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35] 민주화 이후 첫선거 1988년 총선 지역주의 ‘심화’
민주화 이후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 결과는 여소야대였습니다. 민주정의당은 125석으로 전체 의석의 41.8%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당시 선거법이 지역구 의석 1위 정당에게 전국구 의석(75석)의 1/2(38석)을 배분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지역구 의석 비율은 겨우 38.8%였습니다.
제2당은 평화민주당으로 득표율 19.3%로 70석(지역구 54석 전국구 16석)이었고 득표율 23.8%에 59석(지역구 45석 전국구 13석)의 통일민주당이 제3당이었습니다. 신민주공화당은 득표율 15.0%에 35석(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으로 제4당이었습니다. 그밖에 한겨레민주당이 1석 무소속이 9석을 차지했습니다.
눈길을 끄는 건 득표율이 평민당보다 4.5%가 더 높은 통민당이 전국구 배분에서 3석이 더 적었다는 겁니다. 당시 선거법이 전국구 의석을 득표율이 아니라 지역구 의석 비율에 따라 배분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공화당도 득표율은 평민당과 4.3%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전국구는 평민당의 절반 밖에 배분받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은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지역대립 구도였습니다. 평민당은 득표율에서 뒤졌지만 광주와 전·남북의 37석 가운데 36석을 차지하면서 의석수에서 통민당을 앞질렀습니다. 서울에서 17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고 경기도에서 한 석을 차지했을 뿐 나머지 지역에서는 단 한 석도 없었습니다.
통민당은 부산의 15석 가운데 14석을 휩쓸었고 서울에서 민정당과 같은 10석을 차지했지만 경남에서 9석으로 12석의 민정당에 뒤졌습니다. 신민주공화당은 충남의 18석 가운데 13석을 차지했습니다. 민정당은 인천 강원 충북 등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비교적 고른 지지를 받았고, 대구 경북에서는 압도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5개월 전 제13대 대통령선거 때 드러난 지역대립 구도가 다시 한 번 되풀이된 겁니다. 민정당은 티케이(TK), 평민당은 호남, 통민당은 피케이(PK), 신민주공화당은 충청 등 정당 지도자의 출신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대립구도였습니다. 2년 뒤 이뤄진 ‘3당 합당’으로 TK-PK-호남-충청 지역대립 구도가 영·호남 대립구도로 바뀌었습니다.
선거에서 지역대립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바로 1971년 오늘 실시된 제7대 대통령선거 때부터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처음으로 정책선거를 주장하면서 뜻밖의 강세를 보이자 공화당은 지역감정을 자극했고, ‘동서현상’이 강화되었습니다.
‘동서현상’이란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 때 박정희 대통령이 동쪽 지역인 영남, 강원, 충북 등에서 강세를 보이고, 야당의 윤보선 후보는 서쪽 지역인 서울 경기 충남에서 강세를 보였고, 적은 차이지만 호남 지역에서도 앞섰던 것을 말합니다. ‘동서현상’이 나타니기 전인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때는 ‘남북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남북현상’이란 주로 농촌이었기에 보수성이 강한 영호남 지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기고, 수도권과 강원 충청 지역에서는 윤보선 후보가 이겼던 것을 말합니다. 농촌에서는 여당이 강하고, 도시에서는 야당이 강한 ‘여촌야도’였던 셈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호남지역에서 제5대 대선에서는 박 대통령을 더 지지했다는 점입니다.
유신 이후 체육관선거를 치르면서 지역감정 자극은 줄었습니다. 그러나 정통성이 약한 전두환 정권에서 지역감정이 심화되었고,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지역주의를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그 뒤 선거 때마다 지역주의는 선거의 가장 중요한 전략이 되었습니다. 6.1지방선거도 지역주의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