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36] 동반당선 보장 현행 선거구제 전면 개선을

김대중과 유진산(오른쪽). 이들이 지금 어떤 평가를 받고 있나? 그것을 안다면 정치인들이 함부로 나대지 못할 것 같다. 

6.1지방선거가 한달 남짓밖에 남지 않은 4월 26일은 우리나라 선거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날입니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폐지되고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가 17년만에 부활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1988년 오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소선거구제로 치러졌습니다.

소선거구나 중선거구 또는 대선구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은 제도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제도마다 장단점이 있고, 또 나라마다 역사나 정치 풍토, 시민들의 민주시민의식에 따라 적합한 제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유신체제를 떠받쳐 온 제도 가운데 하나인 동반당선제를 폐기시킨 건 의미가 있습니다.

유신체제에서 대통령은 글자 그대로 제왕적이었습니다.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대통령의 권한을 극대화시키고, 국회의 권한과 기능은 최소화시켰습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했습니다. ‘주권적 수임기관’이라는 모호한 이름의 꼭두각시 기구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 국회보다 앞에 놓았습니다.

국회의원 선거구는 소선거구제를 중선거구제로 바꾸어 한 지역구에서 두 명을 뽑도록 했습니다. 6.1지방선거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될 기초의회 의원선거의 중대선거구제와는 의도나 기대효과가 달랐습니다. 소수정당의 원내진출을 촉진하고, 다양한 사회계층을 대표하기 위한 개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독재정권이 선거 승리를 손쉽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신 직전인 1971년 5월 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은 48.8%의 득표율로 총 204석 가운데 113석을 차지했습니다. 과반이었지만 선거 직전보다 16석이나 줄었습니다. 야당인 신민당은 44.4%의 득표율로 선거 직전보다 44석이 늘어난 89석을 차지했습니다. 야당으로선 역대 최고의 성적이었습니다.

독재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건 정치1번지인 서울특별시의 선거결과였습니다. 총 19석 가운데 18석을 야당 신민당이 차지했고, 공화당은 겨우 한 석에 그쳤습니다. 그나마 그 한 석도 유진산 신민당 총재가 후보등록 마감 직전에 전국구 1번으로 등록하면서 무명의 정치신인을 공천한 영등포 갑 지역에서 이긴 겁니다.

유진산과 박정희

영등포 갑 지역 당선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사위인 장덕진 재무부 차관보였습니다. 유진산 총재의 느닷없는 지역구 포기를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유 총재는 당직에서 쫓겨났고 이를 ‘진산파동’이라 부릅니다. 공화당은 제2의 도시인 부산에서도 총 8석 가운데 2석을 차지하는데 그쳤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이겨도 서울과 부산 등에서 패배하면 빛이 바랩니다. 지금도 모든 선거에서 수도권의 승패로 희비가 갈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중선거구제로 바꾸면서 서울과 부산의 공화당 성적이 좋아졌습니다. 중선거구제가 처음 도입된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은 서울에서 7석을 차지했습니다. 신민당은 8석이었습니다.

부산에서는 8석을 공화당과 신민당이 사이좋게 4석씩 나눠 가졌습니다. 소선거구제라면 2위로 떨어졌을 공화당 후보들이 중선거구제라 당선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선거구제는 이렇게 여야의 동반당선이 가능해, 공화당 열세지역에서 의석 확보를 보장해주었습니다. 물론 공화당 강세지역에서는 복수공천으로 공화당 후보들이 동반당선됐습니다.

기초의원 선거구가 대부분 2인 선거구인 건 동반당선이 거대 양당에게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다양한 세력의 지방의회 진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2인 선거구는 다인선거구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쉽게도 6.1지방선거에서는 11개 지역에서만 시범 실시되지만 다음 지방선거에서는 전면 실시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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