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37] 1952년 헌정사상 첫 지방선거부터 정권 개입
4월 25일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지방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된 날입니다. 원래 첫 지방선거는 1950년 12월 실시 예정이었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연기되었습니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쑥 지방선거를 실시한 건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에서 부결시킨 개헌안에 대한 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며 강행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오늘 시·읍·면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시·읍·면의회 의원 선거만 실시한 건 1949년 제정한 지방자치법에 서울특별시·도의회와 시·읍·면의회 의원만 주민 직접선거로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읍·면장은 시·읍·면의회에서 간선으로 선출하고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는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군은 도와 읍·면의 연락기관으로 간주되어 지방자치단체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지방선거에서 빠졌습니다. 당시 지방자치법에서는 서울특별시?도와 시?읍?면만 지방자치단체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연락기관이던 군이 지방자치단체가 되고 읍·면이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단순한 하부 행정기관으로 지위가 격하된 건 5.16 쿠데타 이후입니다.
첫 지방선거가 경기도 강원도 등 일부 미수복지역에서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치안이 불안하다며 아예 선거 대상에서 뺀 겁니다. 선거구는 행정구역으로 구분하고 인구 비례로 책정했습니다. 1 선거구에서 여러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고, 당선자는 다득표 순위로 결정했습니다.
지방선거 투표권자는 6개월 이상 동일 자치단체의 구역 내에 주소를 가진 21세 이상의 주민이었습니다. 지금은 선거인명부작성기준일에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 18세 이상 주민으로 선거권이 확대되었습니다. 피선거권은 선거권이 있는 만 25세 이상의 주민에게 주어졌습니다.
17개 시에서 378명을 선출한 시의회 의원선거는 투표율이 80%였습니다. 72개 읍에서 1,115명을 선출한 읍의회 의원선거 투표율은 88%였습니다. 1,308개 면에서 16,051명을 선출한 면의회 의원선거 투표율은 93%였습니다. 이 가운데 무투표 당선은 3,399명이었고, 무투표 선거구의 유권자는 모두 투표했다고 간주해 전체 투표율은 91%였습니다.
선거 결과 친이승만 세력이 대거 지방의회에 진출하였습니다. 무소속이 시의원 172명 읍의원 430명 면의원 6,867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 친이승만이었습니다. 정당으로는 자유당이 시의원 114명 읍의원 274명 면의원 4,056명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시의원 7명 읍의원 7명 면의원 21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이 총재를 맡고 있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출마자 가운데 2,621명이 당선되었고, 2,843명의 당선자를 배출한 대한청년단(단장 안호상) 등도 친이승만 세력이었습니다. 2주일 뒤 5월 10일에 실시된 도의회 의원 선거 결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총 306명의 도의원 가운데 친이승만 세력이 298명이나 됐습니다.
자유당이 147명이었고 무소속 85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32명 대한청년당 34명 등이었습니다. 민주국민당은 4명에 그쳤습니다. 도의회 선거는 전라북도 남원·완주·순창·정읍 등 지리산 부근 지역의 선거를 치안 관계로 연기하는 바람에 유권자 수가 시·읍·면의회 선거보다 줄었습니다. 투표율도 낮아져 81%를 기록했습니다.
지방의원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기대에 부응해 맹활약(?)했고 마침내 발췌개헌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되었습니다.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지방의회를 이용하려던 이 대통령의 의도가 성공한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때 만들어진 부정적 이미지가 지방자치를 30년 동안 단절시키는 빌미를 주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