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71] 한국 지방자치의 ‘흑역사’

1961년 5월 16일, 군사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가운데) 왼쪽은 박종규, 오른쪽은 차지철 <사진=위키피디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은 지방자치를 중단시켰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6일 당일에 발표한 포고 제4호에서 전국의 지방의회를 해산시켰습니다. 이어 6월 6일에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해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 인구 15만명 이상인 시의 시장은 내각이 임명하고, 기타 자치단체장은 도지사가 임명하도록 했습니다.

9월 1일에는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했습니다. 이 법을 근거로 지방자치법은 효력이 정지되었습니다. 연락기관이던 군이 지방자치단체가 되었고 읍·면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단순한 하부 행정기관으로 지위가 격하되었습니다. 해산된 지방의회의 기능은 서울특별시와 도는 내무부장관이, 시?군은 도지사가 대행하도록 했습니다.

이 기조가 제3공화국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지방의회의 조직과 권한, 의원 선거와 지방자치단체장의 선임방법,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사항은 법률로 정하도록 했지만 헌법 부칙에 “최초의 지방의회의 구성시기에 관하여는 법률로 정한다”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사실상 지방자치의 실시를 불가능하게 만든 겁니다.

이로써 지방자치단체는 자치권을 빼앗기고 하나의 행정단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1964년 개정된 지방자치법에서도 지방의회 기능은 상급 행정기관이 대행하도록 하고, 읍·면은 군의 하부 행정기관임을 확인했습니다. 서울특별시 의회의 역할은 나중에 국무총리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임명제로 바뀐 지방자치단체장은 국가공무원이 되었습니다.

1972년 12월 27일 제정된 유신헌법에서도 지방자치의 조직과 권한, 구성, 운영 등 지방자치에 대한 기조가 제3공화국 헌법과 동일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아예 헌법에 못 박아 놓았습니다. 헌법 부칙으로 “지방의회를 조국통일이 이뤄질 때까지 구성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해 놓은 것입니다.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지방자치 실시에 관한 헌법상의 규정을 완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제5공화국에서도 지방자치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헌법 부칙의 지방자치 유보조항 때문입니다. “지방의회 구성은 재정자립도를 감안하여 순차적으로 하되”라는 규정을 근거로 지방자치 실시 요구를 그때마다 낮은 재정자립도를 핑계로 거부했던 겁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진 군사정권은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꾀했으므로 지방자치를 유보했습니다. 집권 여당 권력기반의 약화를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방자치의 실시, 즉 분권화가 1980년대 한국정치에서 민주화의 상징 가운데 하나였기에 야당은 끊임없이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지방자치의 실시를 요구했습니다.

여당도 지방자치를 계속 거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겠다는 약속은 하면서도 실시 의지가 전혀 없었기에 이런저런 핑계로 미뤘습니다. 1984년에는 1987년 상반기 중 실시를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습니다. 1985년에는 ‘지방자치제실시 연구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실시는커녕 지방자치법 관련 조항 개정도 못했습니다.

지방자치가 부활된 것은 1980년대 후반 민주주의가 회복된 뒤입니다. 지방자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약속한 것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였습니다. 6월 항쟁에 밀려 지방자치 실시를 약속한 겁니다. 6월 항쟁은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과 국민을 겨냥한 공포 등 파시스트적 통치로 유지되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란’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최대의 정치적 위기인 6월 항쟁 국면을 시민에 대한 ‘민주화’ 약속인 6.29 선언을 통해서 가까스로 넘겼습니다. 6.29 선언에 제시된 여러 가지 민주화 약속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방자치의 실시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도 지방자치가 바로 실시된 것은 아닙니다. 4년 뒤인 1991년에야 지방자치가 부활되었습니다. 지방자치 중단 30년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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