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70] 30년 걸렸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노태우 정권 당시인 1990년 지방자치제 실시를 요구하며 2주 가까이 단식투쟁을 했다. 단식 사흘 만에 당시 여당 대표였던 김영삼이 그를 찾아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3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고 지방자치를 반대하던 정부와 여당은 논의에 들어갔다. 그의 단식을 계기로 그해 12월 지방자치 실시가 최종 합의됐다. 이어 다음 해인 1991년 지방선거·기초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지방자치제 도입이 본격화됐다. <사진 연합>

6월항쟁의 성과로 독재자 박정희가 빼앗은 대통령을 직접 내 손으로 뽑을 권리가 17년 만에 시민에게 돌아왔습니다. 현행 헌법인 제6공화국 헌법의 핵심은 ‘임기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입니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들어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독재자들이 30년 동안 숨통을 끊어 놓았던 지방자치도 되살아났습니다.

현행 헌법에서는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있던 지방자치 유보조항을 삭제하고 지방자치를 독립된 장(章)으로 만들었습니다. 노태우 정부 출범 다음 달인 1988년 3월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폐지했고, 지방자치법을 개정했습니다. 4월 6일 공포된 7차 개정 지방자치법은 부칙에 1989년 5월까지 지방의회 의원 선거를 못 박았습니다.

지방자치단체는 광역과 기초로 나눴습니다. 15개(지금은 17개) 서울특별시·직할시·도는 광역자치단체가 되었습니다. 기초자치단체에는 시·군·자치구가 해당됩니다. 특별시와 직할시의 자치구가 새로이 기초자치단체로 인정받았습니다. 자치단체장은 주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되, 법률로 정할 때까지는 임명제를 유지하도록 하였습니다.

시·군·자치구 의회를 1989년 4월 이내로 구성하며, 그로부터 2년 이내에 시·도 의회를 구성하기로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방자치의 봄날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여야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고,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소야대가 되자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시·군·자치구의회의 구성을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야3당이 자치단체장 선거를 지방의회 선거보다 먼저 실시하고, 읍·면·동장까지 직선으로 선출하는 내용의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제출했습니다. 이 개정안은 1989년 3월 여소야대 국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야3당 개정안은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끝내 법정기한인 1989년 5월까지 지방의회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여론은 나빠졌고, 다시 협상을 벌인 여야는 1989년 12월 19일 제8차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90년 6월 30일 이내에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의 의회를 구성하고 1991년 6월 30일까지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기로 했습니다.

지방자치 부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 합의도 지켜지지 않았던 겁니다. 1990년 초에 전격적으로 3당 합당을 통해 여대야소가 된 뒤 여당 민자당이 지방선거를 일방적으로 연기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지방자치제 실시와 내각제 포기, 군의 정치적 중립 보장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였습니다.

여당이 김대중 총재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하면서 비로소 지방자치가 부활되었습니다.  1990년 12월 31일 여야는 1991년 상반기 중에 지방의회 의원 선거를 하고 1992년 상반기 중에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지방자치법과 지방의회의원선거법을 개정했고, 지방자치단체의 장 선거법을 제정했습니다. 드디어 1991년 3월 26일 기초자치단체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4월 15일 기초의회가 개원했습니다. 5.16 군사쿠데타로 지방자치가 정지된 지 30년 만입니다. 이어서 6월 20일 광역의원 선거를 실시했고, 광역의회는 7월 8일 개원했습니다. 그러나 제14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부담을 느낀 노태우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단체장선거를 연기하는 바람에 반쪽짜리 지방자치 부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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