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67] 1991년 6월 30년만의 광역선거, 민자당 ‘압승’
요새와는 달리 지방자치가 30년만에 부활된 1991년 선거에서는 기초의회 의원선거와 광역의회 의원선거를 같은 날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기초의회는 3월 26일 선거를 치러 4월 5일 개원했습니다. 광역의회는 6월 20일 선거를 치러 7월 8일 개원했습니다. 광역의회 선거 결과도 기초의회 선거와 마찬가지로 민주자유당의 압승이었습니다.
민자당은 39.8%의 득표율로 전체 의석 866석의 3분의 2가 넘는 564석을 차지했습니다. 호남과 제주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지역에서 이겼습니다. 제주도는 17석 가운데 8석으로 무소속보다 1석 적었을 뿐입니다. 기초선거 이후 평민당이 확대 개편된 신민주연합당은 득표율 21.5%로 민자당의 3분의 1도 안 되는 165석에 그쳤습니다.
신민당은 호남 3개 시·도(광주 전남·북)에서만 좋은 성적을 냈을 뿐, 야당이 대대로 강세였던 수도권에서조차 민자당에 크게 뒤졌습니다. 단 1석도 얻지 못한 시·도도 7곳이나 되었고, 대전과 경남도 각각 2석, 1석만 차지했을 뿐입니다. 민주당은 득표율 14%로 21석을 차지했습니다. 민중당은 1석(강원도 정선)을 차지했습니다.
눈에 띠는 건 무소속의 약진입니다. 모두 115명인데 제주도에서는 민자당보다도 무소속이 더 많았습니다. 무소속은 경기 강원 충남 등 중부권과 영남지방에서 강세였습니다. 민자당 공천에서 탈락되자 무소속으로 출마한 친여후보가 많았던 겁니다. 전교조가 무소속으로 다수 출마시켰지만 광주와 제주 각 1명씩밖에 당선시키지 못했습니다.
민자당은 열세일 것으로 판단했던 수도권에서도 의석을 싹쓸이했습니다. 민자당은 서울 132석 가운데 110석, 인천 27석 가운데 20석, 경기도 117석 가운데 94석을 차지했습니다. 반면 신민당은 서울 21석, 인천 1석, 경기도 3석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인천에서는 3석을 차지한 민주당보다도 뒤졌습니다.
민자당은 기초의원 선거에 이어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서울과 대구 부산 등 대도시에서 이겼습니다. 도시에서는 야당이 강하고 농촌에서는 여당이 유리하다는 지방선거 이전까지의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선거 구도가 깨진 겁니다. 지방선거는 3당합당 이후 첫 선거였는데, 3당합당으로 나타난 호남고립구도가 그대로 선거 결과에 반영된 것입니다.
기초선거와 광역선거 사이에 나타난 몇 가지 사건도 민자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정원식 총리 밀가루·계란 세례’입니다.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항의하는 분신이 이어졌는데 1991년 5월 8일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이 분신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검찰은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김기설의 친구인 강기훈씨를 구속 기소했습니다. 이 사건은 재심을 거쳐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에서 유서 대필과 자살 방조에 대해 무혐의·무죄로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사건이 검찰의 언론플레이로 민주화운동의 도덕성에 타격을 줌으로써 민자당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광역의회 의원선거를 앞두고 국면전환을 위해 5월 24일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를 지명했습니다. 6월 3일 한국와국어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한 정 총리가 학생들로부터 계란과 페인트와 밀가루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군사부 일체’라는 유교적 가치관이 부각되면서 학생운동에 비판이 커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사회 분위기가 다소 보수화되면서 민자당이 광역의회 의원선거에서 크게 이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투표율은 58.9%로 기초의원 선거보다는 다소 높아졌지만 여전히 50%대에 머물렀습니다. 특히 젊은 층의 투표율이 낮아서 야당과 진보 후보들에게 불리했다는 평가들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