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68] 1991년 오늘, 기초의원 선거 30년만에 부활
3월 26일 오늘은 지방자치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의미 있는 날입니다. 1991년 오늘은 기초의회 의원 선거가 30년 만에 부활되어 실시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제1차 기초의회 선거에서는 3,562개 선거구에 9,963명이 출마하여 경쟁률은 평균 2.3 대 1이었습니다. 투표율은 55%로 당시로선 역대 각종 선거 가운데 가장 낮았습니다.
농촌은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도시는 상대적으로 낮은 도저촌고(都低村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대도시 투표율은 44.7%, 일반시의 투표율은 54.7%, 군 단위 지역의 투표율은 70.9%였습니다. 지방선거가 중앙정치의 지역주의적 대결구도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약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선거 직전까지는 집권여당인 민자당이 불리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그렇지 않아도 지지율이 낮던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에 불리한 사건이 잇달아 터졌기 때문입니다. 2월 3일 세계일보가 노태우 정부 최대의 권력형 비리로 꼽히는 수서택지 분양특혜 사건을 특종 보도했습니다. 3월 14일에는 페놀이 낙동강을 오염시켰습니다.
수서비리는 청와대·행정부·서울시·여당·야당·독점재벌(한보그룹)이 유착한 대형 스캔들입니다. 장병조 청와대 비사관과 이태섭 민자당 의원, 이원배 신민주연합당 의원 등 7명이 구속되었습니다. 민중당은 수서특혜 은폐조작 부패정권 규탄대회를 열어 비리주범을 색출 처단할 때까지 지방자치제 선거 등 정치일정 거부를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은 구미 공업단지 안의 두산전자에서 페놀 30여톤이 낙동강으로 유입된 사건입니다. 페놀 피해는 대구의 상수원인 다시취수장을 거쳐 낙동강을 타고 밀양과 함양, 부산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낙동강 수계의 물을 사용하는 영남지역 주민들 1천만 여명이 페놀 오염 수돗물로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낮은 투표율 영향도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민자당이 크게 이겼습니다. 당시는 정당공천이 없었지만 민자당원들이 과반을 차지한 시·군·구의회가 260곳 가운데 190곳이나 됐습니다. 기초의원 4,304명 가운데 민자당원이 2,142명으로 과반에는 못 미쳤지만 평화민주당원보다는 세 배 가까이 많았습니다. 평화민주당원은 785명이었습니다.
평화민주당은 전통적으로 야당세가 강한 서울에서 크게 졌습니다. 평민당의 지역적 지지기반인 호남에서도 민자당 당선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앙정치의 지역구도를 깨는 것도, 지방권력구조의 개편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의 지역 조직력이 강해진데다 아권이 분열되었던 탓입니다.
또 지방선거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지역유지들의 활동공간을 확대시켜 주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당시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소장)은 지방선거가 지역주민들의 잔치가 아니라 “풀뿌리 보수주의자들의 잔치”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했습니다. 지방선거가 지역유지를 “명실상부한 지역의 명사와 실력자로 바꿔 놓”았다는 겁니다.
민주화의 성과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정치적 자리 배분에 그친 건 정말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런 경향은 두 달 반 뒤 실시된 광역의회 의원선거에서도 되풀이되었습니다. 기초의회 선거와는 달리 정당공천을 했던 광역의회 선거는 당선가능성이나 지명도 등에서 앞서는 지역유지나 관료 출신들이 공천받기가 상대적으로 유리했던 겁니다.
참고로 1991년 기초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투표용지에서 후보 이름을 한글로만 기재했습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다시 투표용지에 후보의 한글 이름과 한자를 병기했다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부터는 투표용지에서 한자를 완전히 빼버렸습니다. 이때부터 투표용지에는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만 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