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지선 전망대 D-65] 이인제 경기지사·노무현 부산시장 출마로 대선후보 도약

김영삼 전 대통령 영정에 인사하는 이인제 전 경기도지사.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 모습이 보인다. 이인제는 1995년 ‘깜짝 놀랄 후보’로 출마해 경기지사에 선출된 후 2년 뒤 대선 후보로 일약 도약했다.  

우리 역사에서는 지방자치 실시를 민주적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대표적입니다. 6.29 선언과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지방자치의 실시를 약속했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법을 어기고 때로는 법을 고쳐서 지방자치 실시를 계속 거부했습니다.

1988년 4.26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자 지방자치 부활을 꺼려 지방선거를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1989년 단체장 선거를 지방의회 선거보다 먼저 실시하고, 읍·면·동장까지 직선으로 선출하는 내용의 개정지방자치법은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시켰습니다. 1990년 3당합당으로 여대야소가 되자 또 지방선거를 일방적으로 연기했습니다.

노태우 정권에서 30년 만에 지방선거를 실시했고 지방의회가 개원했지만 그 공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김대중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이 아니었다면 노태우는 지방자치를 계속 거부했을 겁니다. 마지못해 실시한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민자당이 크게 이겼지만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미뤘던 겁니다.

어찌 되었건 1991년에 지방자치의 서막은 올랐습니다.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는 4년 뒤 1995년에 열렸습니다. 문민정부에 들어와 1994년 3월 16일 지방자치법을 개정하고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을 제정해 자치단체장 선거와 지방의원 선거의 동시실시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드디어 1995년 6월 27일 제1회 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지방자치 중단 이전에는 지방자치 각급 선거를 따로 치렀습니다. 1960년에는 한 달 사이에 네 차례나 선거를 치렀고, 너무 잦은 선거로 주민들의 관심이 낮아졌습니다. 그래서 4개의 지방선거를 동시에 실시하게 됐습니다. 1995년 지방선거가 제1회 동시지방선거가 되었고, 올해 6.1 지방선거가 제8회 지방선거가 되는 겁니다.

국회의원 선거와의 주기를 2년 간격으로 맞추려 1995년 제1회 동시지방선거에서 선출된 지방정치인의 임기는 3년이었습니다. 이때 광역의회 의원의 비례대표제도가 도입되었는데, 정당투표제 도입 전이어서 광역단위로 지역구 출마 후보들의 표를 합산해서 비례의석을 배분했습니다. 정당투표제는 2002년 제3회 동시지방선거 때 도입됐습니다.

제1회 동시지방선거를 통해 광역과 기초 지방의회 의원, 광역과 기초 지방자치단체장을 모두 동시에 선출했습니다. 대도시 투표율 54.1%, 시 투표율 56.6% 군 단위 지역 투표율 70.5%였습니다. 이로써 지방자치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상징과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실천의 의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광역단체장을 주민 직선으로 선출한 것을 계기로 지방자치가 정치 충원의 중요한 통로로 등장하게 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깜짝 놀랄만한 후보”라는 발언이 주목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이인제 경기도지사는 유력한 ‘차기 주자’로 떠올랐습니다. 이인제 지사는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 때 출마해 떨어졌으나 492만표를 받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졌지만, 지역할거주의 극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 때 부산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73.3% 김대중 대통령은 12.5%를 득표했습니다. 그런데 문정수 민자당후보 51.2% 노 대통령 37.6%를 득표했던 겁니다. 노 후보는 마침내 2002년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화제의 인물은 등장하지만 단체장처럼 유력정치인으로 부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1991년 광역의회 선거 때 야구선수 최동원씨가 부산에서 출마했다 떨어졌고, 가수 이선희 씨는 서울에서 당선됐습니다. 3.9대선에 출마했던 허경영 후보는 서울에서 구의원과 시의원에 떨어졌습니다. 이번 대선에서는 누가 조명을 받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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