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①] 백두산 지맥 함흥 동북 홍원군 산촌마을의 전설

국내 최초 죽염 발명가이자 한방 암의학 창시자인 인산 김일훈 선생(1909~1992)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인산 죽염으로 잘 알려진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은 각종 암치료 신약을 발명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독창적인 한방 암치료를 설파하며 난치병 환자를 평생 치료했다. 선생은 만성 질환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일이 없는 세상, 육신이 파괴되는 질병의 고통이 사라지는 세상, 암 환자 발생이 1%대로 낮춰지는 세상, 80대 노인들이 20대 청년들과 함께 일하며 낙원을 만드는 꿈. 이는 선생과 셋째 며느리로 인산 김일훈 문하에서 선생의 묘수, 비법을 전수받은 최은아 한의학박사의 바램이다. <아시아엔>은 최은아 박사가 쓴 <인산 김일훈 선생 전기 의황(醫皇)을 연재한다. 독자들의 애독과 건강 증진에 보탬 되길 바란다. <편집자>

일본이 침략해 들어오던 1900년대 초 한국은 무능한 정부와 사리사욕에만 급급한 관리와 힘없는 백성이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해 가던 암울한 시기로 누구 하나 시대적 불운을 막을 방도가 없어보이던 때였다. 당시 함경도 함흥의 동북쪽, 동한만(東韓灣)에 인접한 내륙에 위치한 홍원군 용원면 연흥리는 약 150여 호가 모여 사는 한적한 산촌 마을이었다.

함경도 홍원군 지도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고장에서 만백성을 액난(厄難)으로부터 구원해 낼 위대한 성자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이 전설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곳 사람들은 무슨 믿을 만한 근거가 있어서도 아니었고, 그곳에서 탄생하리라는 성자가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도 모르는 채 그냥 그렇게 믿으며 살아왔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그 전설 속에 성자의 출현 시기를 짐작케 하는 단서라고는 물론 없었다.

단지 성자가 강림하는 까닭은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막연한 생각이 함께 전승되었기에, 언제고 백성들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었을 때 그 성자는 나타나실 것이라고 여길 뿐이었다. 그런데 운룡의 할아버지인 김면섭의 대에 이르러 주변 사람들 중에는 만일 전해지는 예언대로 성자가 탄생하게 된다면 그것은 향교 전교인 김면섭의 집안에서일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그들이 그렇게 예견하는 가장 뚜렷한 이유로는 운룡의 집안에서 썼던 묏자리와 결코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었다.

용원면 내에는 ‘번개늪’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규모의 소호(沼湖)가 있었는데 그 늪 근처와 그곳에서 20리가량 떨어진 곳에 운룡의 12대조인 사지공(四知公)의 장남과 5남의 묘소가 있다. 특히 5남 한공공(漢功公)은 운룡의 직계로 11대조이다. 번개늪 쪽에 자리한 장남의 묘는 천주낙반(天珠落盤, 하늘 구슬이 떨어져 쟁반 위에 받쳐짐) 형국의 혈처(穴處)로, 5남 한공공의 묘는 백로규어(白鷺窺魚, 백로가 물고기를 사냥하기 위해 엿보고 있음) 형국의 혈처로 알려진 명당이었다.

그리고 간좌곤향(艮坐坤向)의 장군대좌(將軍大座)에 자리한 문중산에는 운룡의 여러 조상들이 모셔져 있었는데, 그중 운룡의 할아버지 김면섭의 양가(養家) 조부모와 부모의 묘는 응소(鷹巢, 매 둥지) 형국의 혈처에 쓰였고, 김면섭의 생가(生家) 어머니, 즉 운룡의 증조모의 묘는 노승예불(老僧禮佛) 형국의 혈처에 쓰였다.

그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많은 화제를 불러 모은 것이 김면섭의 생모 청주 한씨(韓氏)가 모셔진 묏자리였다. 그 묏자리는 김면섭이 젊었을 때 생모가 돌아가시면 모시고자 지관(地官)으로 이름을 날리던 외숙(생모의 동생)에게 부탁하여 미리 잡아두었던 자리였다.

백두산의 지맥 한 자락이 동남방으로 흘러 점차 기세를 늦추는 듯하다가 갑자기 기를 뭉쳐 불끈 솟아 올라간 것이 두무산(頭無山)이며, 그 두무산에서 다시 뻗어 내려가던 기운 찬 주룡(主龍)의 발치에 운룡의 증조모 유택(幽宅)이 자리하였다. ‘노승예불 형국지지’로 불린다는 점을 미리 알고 그 묏자리 앞에 서면, 보통 사람들도 단번에 그 자리가 어째서 ‘노승(老僧)이 예불을 드리는 모습’의 혈처로 지칭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주산(主山)과 좌청룡(左靑龍)ㆍ우백호(右白虎)ㆍ안산(案山) 등의 지형이 일목요연하게 뚜렷하였다. 그런데 그 자리를 길지(吉地)로 선택한 김면섭의 외숙은 운룡의 증조모 장례를 모신 직후에 김면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누님과 조카인 자네를 생각해서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을 천거하여 마침내 누님을 그 자리에 모시긴 했네만, 솔직히 말해서 마음 한편에 걱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닐세. 무릇 세상의 이치가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는 법인데, 자네나 자네 생가의 형제들 기량(器量)으로 이 천하 길지의 대복(大福)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 적이 염려스럽네. 만일 집안에 탈이 생기면 자네가 잘 알아서 지혜롭게 대처하게. 묘를 썼으므로, 땅 기운이 제대로 발할 때까지는 우선 집안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를 것일세.”

아닌 게 아니라 그로부터 눈에 띄게 가세가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집에서 먹이던 소나 돼지 등의 가축들이 원인도 모르게 죽어갔고, 농사는 흉작을 거듭했다. 결국 봇물 새듯 집안의 전답들이 하나 둘 남의 손에 넘어가, 더 이상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들 지경에 이르자 집안에서는 운룡의 증조모 묏자리를 잘못 써서 동티가 난 것으로 의견들이 모아졌다. 그리하여 완전히 패가(敗家)하는 것을 막으려면, 하루 빨리 운룡의 증조모 묘소를 이장(移葬)해야 한다는 것이 집안의 중론이 되었다.

외숙으로부터 미리 들은 바가 있었던 김면섭은 지금 당장 눈앞만 볼 것이 아니라 훗날을 내다보고 작금의 어려운 현실을 견뎌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이미 큰집의 양자로 들어간 그로서는 생가 맏형이 주장하는 어머니 산소의 이장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생가의 형제들에게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난을 감내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드디어 운룡의 증조모가 모셔진 묘의 봉분이 파헤쳐지고 석회다짐을 했던 부위에 산역꾼의 곡괭이 날이 내리 찍혀 구멍이 생겼다. 그 순간 시신이 안치된 광(壙) 속에서 거대한 범종(梵鐘)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쩌엉!’ 하고 나더니, 그 구멍으로부터 뽀오얀 수증기가 거세게 분출하였다. 순식간에 묘역이 짙은 안개에 휩싸일 판이었다.

“어머니가 노하셨다!”

어느 형제인가가 소리를 치며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에 따라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줄줄이 머리를 흙더미에 처박고 부복(俯伏)한 채 벌벌 떨고만 있었다. 김면섭은 재빨리 자신의 웃옷을 벗어 뭉쳐 쥐고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구멍을 더듬어 찾아 틀어막았다.(김면섭은 그때 생모의 무덤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김을 쐬는 바람에 등이 구부러져 평생토록 허리를 곧게 펴지 못하게 되었다.) 수증기의 분출이 멎자 가족들은 서둘러 파헤친 산소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구하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김면섭의 외숙이 찾아와 등이 구부러진 외조카의 모습을 보더니 크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그토록 일렀건만, 결국 파묘(破墓)를 했던 게로구나. 그래도 네 몸이 그만한 정도에서 더 상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로구나. 3대(三代)에 걸쳐 부처가 나올 대지(大地)였건만, 이제 겨우 한 분밖에 나올 수 없게 되었고, 그나마 평생 운학(雲鶴)의 역경을 면치 못할 터이니 애석하기 짝이 없구나.”

김면섭은 그 일이 있은 후, 이미 슬하에 두었던 장남 경삼(慶參)의 밑으로 두 아들을 더 얻었으나 그 아들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고, 훗날 외아들 경삼의 슬하에서 태어난 7남 2녀의 자녀들 가운데 셋째아들이 바로 운룡이다.

최은아 대표가 김일훈 선생 대형 포스터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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