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2] 한 표의 소중함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 ‘2.8공원’이라는 쌈지공원이 있습니다. 공원의 이름 2.8은 2.8 독립선언에서 따온 것입니다.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조선 독립을 선언한 2.8 독립선언은 일주일 전인 2월 1일 만주 길림성에서 발표된 ‘무오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았고, 선언문은 춘원 이광수가 지었습니다.
2.8공원에는 ‘상산 김도연 박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흉상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 11명의 한 사람으로 이곳 태생입니다. 결의문을 읽은 김 박사는 도쿄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습니다. 창씨개명을 거부해 총독부 감시대상인 두 번째 불령선인으로 찍혔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20개월 옥살이를 했습니다.
김도연 박사는 정부 수립 후 초대 재무부 장관을 지냈으나 바로 야당인 민주국민당으로 옮겼습니다. 4.19 이후 수립된 제2공화국 총리로 지명을 받았으나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인준에 필요한 표에서 3표가 모자랐습니다. 다시 지명을 받은 장면 박사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인준에 필요한 표보다 2표가 많았습니다.
민주당은 창당 때부터 줄곧 구파와 신파로 갈려 있었는데, 윤보선 대통령과 김도연 의원은 구파, 장면 총리는 신파였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구파, 김대중 대통령은 신파로 분류됩니다. 대통령과 총리는 사사건건 부딪쳤습니다. 마침내 구파가 탈당해 신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신구파의 갈등은 박정희 등 정치군인들에게 쿠데타의 빌미를 주었습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무총리 장면은 수녀원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대통령 윤보선은 유엔군사령관과 미국대사의 쿠데타 저지를 위한 병력동원 허가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내각책임제라 자기에게 군통수권이 없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상 쿠데타를 방조한 셈입니다. 이로써 6월 항쟁이 일어날 때까지 30년 가까이 군부독재가 이어졌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일 김도연 박사가 국무총리였다면 5.16 쿠데타에 대한 대응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김 박사가 총리가 되지 못한 건 3표가 모자라 국회 인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면 박사는 겨우 2표가 더 많았지만 총리가 됐습니다. 3표 부족과 2표 초과, 이 작은 차이로 불과 몇 달 뒤 나라의 운명이 바뀐 샘입니다.
3표로 정치적 운명이 바뀐 사례는 또 있습니다. 지금 이재명 후보의 정무특보단장을 맡고 있는 문학진 전 의원은 ‘문세표’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한 2000년 제16대 총선거 경기도 광주군 선거구에서 박혁규 한나라당 후보에게 단 세 표 차이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투표율 0.01% 차이였습니다.
경북 봉화·울진 선거구에서 김광원 한나라당 후보에게 19표 차이로 진 김중권 새천년민주당 대표도 정치적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국민의 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 대표는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였지만 선거 패배로 힘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중도사퇴했고, 탈당 뒤 몇 차례 무소속출마 패배 뒤 정계를 떠났습니다.
이들 말고도 제16대 총선에서는 아슬아슬하게 당락이 갈린 후보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서울 동대문 을 선거구에서 김영구 한나라당 후보는 허인회 새천년민주당 후보에게 11표 차이로 이겼습니다. 0.01% 차이였습니다. 충북 청원 선거구에서는 신경식 한나라당 후보가 오효진 자민련 후보에게 16표 차이로 이겼습니다. 0.05% 차이였습니다.
선거 결과는 시민 한 명 한 명의 선택들이 모인 것입니다. 수천만 표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결국 선거 결과를 결정짓는 건 내가 찍은 한 표인 겁니다. 후보 개인으로 보면 정치적 운명이 바뀌는 것이지만 우리 시민의 관점에서 보면 나라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내 한 표’는 소중합니다. 소중한 ‘내 한 표’로 나라를 바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