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견해 차이와 함께 살기···Agree to Disagree
[아시아엔=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 1.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탄탄한 논리와 호소력을 지닌 이견(異見)은 큰 보탬이 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안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배움엔 끝이 없고 세상엔 고수들도 많다. 나는 페이스북을 주로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 정치관이 다르지만 좋은 글을 쓰는 분들에게 내가 먼저 페친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2. 페이스북 같은 SNS의 알고리듬은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를 부추긴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격려하면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뉴스 가운데 입맛에 맞는 정보만 편식하고 확대재생산한다(사회적 폭포수 효과). 집단 극단화가 범람하고 같은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반향실 효과’가 극대화할 때 자신들만 믿는 대안세계가 탄생한다. 그 집단 안의 토론은 자폐적 자기 정당화를 키워 다른 진영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시키고 상대 진영을 국가의 적이자 민주주의의 파괴자라며 악마화한다. 바로 이것이 미국사회를 두 쪽으로 갈라놓은 ‘트럼프 현상’의 한 배경이었으며, 치열한 대선과정 동안 한국사회에서 진행되었던 사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3. 페이스북에서 나는 정치적 견해가 다른 분들의 게시글도 꼼꼼히 읽는다. 막말과 욕설이 아니라면 페친들을 차단하지 않는다. 물론 나와 다른 현실정치관을 강고하게 유지하는 분들의 글을 읽을 때 내 마음이 편치는 않다. 어떨 땐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지?’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내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한다. 그분들은 다른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내 글을 읽으면서 똑 같이 마음이 불편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역지사지보다 더 어려운 것도 없다.
4. 집단 극단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완전한 중립성이나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가치 담지적’(value-laden, 로버트 핸슨)이고, 모든 담론은 권력-지식 연계(power-knowledge nexus, 미셀 푸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담론과 담론, 입장과 입장 사이에서 합리적 토론과 교차검증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비록 입장이 달라도 우린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토론을 할 수 있고 오류를 인정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담론에 직면해 내 관점을 수정할 수도 있다. 그런 열린 태도가 민주주의와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
5. 과거엔 내 글과 말에도 파랗게 날이 서있을 때도 있었다. 학회에서의 내 비판을 두고 어떤 선배 교수는 ‘호랑이가 물어뜯는 것 같았다’고 뒷풀이 자리에서 토로한 적도 있다. 쇼펜하우어적 논쟁술로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으면서 내심 의기양양할 때도 있었다. 부끄럽게 생각하며 깊이 반성한다. 성숙하지 못한 자의 치기였을 뿐이다. 지금도 잘되지는 않지만 가능하면 온건하고 부드럽게 얘기하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좋은 게 좋은 것이다’는 태도를 취하는 건 아니다.
6. 몇 년 전 뉴욕에 사는 대학 친구와 트럼프 문제로 격렬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내가 보기에 그 친구는 ‘트럼프빠’였고 러시아발 가짜뉴스 영향을 많이 받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 친구가 보기엔 나는 미국정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국 민주당과 미국 주류 언론 보도에 현혹된 상태였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논쟁이 비등점에 달했을 때 나는 친구에게 제안을 했다. 이제 미국정치에 관한 한, 우리 ‘Agree to Disagree’(견해 차이를 인정하되 상대방을 존중)하자고. 그 후 우린 동창 카톡방에서 트럼프 평가를 삼가면서 돈독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내겐 우정이 더 소중하다.
7. 내 고향은 호남이다.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자마자 광주로 왔고 고교 졸업 때까지 청소년 시절의 모든 기억은 광주에서 비롯한 것이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갈 때 호남터널을 지나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뉴욕 친구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고향 친구들(대부분 초·중·고 친구들)과 한국정치 얘기를 삼가는 편이다. 친구나 가족 같이 가까운 사이엔 정치 토론하다가 서로 격앙돼서 선을 넘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정치나 종교에 대해 친구나 지인들과는 논쟁하지 않는 게 좋다는 공감대가 생긴 것은 삶의 지혜이기도 하지만, ‘정치의 종교화’라는 현대사회의 질병에 시달리는 우릴 돌아보며 씁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8. 그럼에도 민주다원사회에서 정치 토론은 불가피하다. 나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은 우리의 적(敵)도 아니고 상종 못할 몰상식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분들은 단지 나와 생각이 다른 동료 시민들일 뿐이다. 20대 대선에서 나는 정권이 교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지만 초(超)박빙 선거결과가 증명하듯 정권이 재창출되어야 한다고 믿은 분들도 너무나 많다. 중요한 것은 정권교체를 원하는 사람이나 정권유지를 원했던 이들이 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9. 우리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와 ‘함께’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민주공화국 시민들의 운명이다. 나하고는 정치적 견해가 다를 지라도 그 다름을 틀렸다고 감정적으로 매도하지 않는 마음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 물론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이런 (고상한) 말을 하는 나도 실행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려는 시민들의 노력과 훈련 없이 한국사회가 지금의 천하대란을 헤쳐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