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94] 한방의 추억
[아시아엔=손혁재 자유기고가] 이준석 대표와 윤석열 후보 간의 갈등으로 표류하는 듯했던 국민의힘이 며칠만에 정상 운항에 들어갔습니다. 대선 승리를 향한 험난한 항해를 책임질 선장으로 김종인 선대위원장을 영입하는 과제도 한방에 끝냈습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영입 1호인 조동연 서경대 교수의 사퇴로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이재명 후보가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며 조동연 교수의 사의를 받아들인 건 다소 아쉬움이 있습니다. 조 교수가 정치에 몸을 담기는 했지만 선출직도 아니고, 공직에 입후보하거나 취임한 것도 아닙니다. 조 교수의 사생활이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는데 가정사를 까발리고 어린 자녀의 신상까지 공개한 건 인권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물러났지만 조 교수를 정치로 끌어들인 더불어민주당은 조 교수를 지켰어야 합니다. 사의를 받아들인 것은 조 교수 영입을 ‘브롯지’에 비유해 구설수에 올랐던 김병준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문제적 발언을 정당화시켜 주었습니다. 또 득표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끌어들였다가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버리는 ‘한탕주의 영입’이라는 비판도 받게 됩니다.
선거에서 각 정당이나 후보들은 상대를 한방에 보낼 방법을 찾으려 애를 씁니다. 1997년 대선에서 DJP 단일화를 통해 이회창 후보를 한방에 보내고, 2002년에는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로 이회창 후보를 한방에 보냈듯이 상대를 한방에 쓰러뜨리겠다는 겁니다. 이재명 후보를 ‘대장동’으로, 윤석열 후보를 ‘고발사주’로 공격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한방에 보냈다’는 것은 왜곡된 기억입니다. 한방이 있었지만 통쾌하게 이긴 것이 아니라 아주 힘겨운 승리였습니다. 1997년의 한방은 ‘병역비리’였습니다. 파죽지세로 앞서가던 이회창 후보는 병역비리 한방에 낙마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는 DJP연대를 하고서도 이인제 후보의 500만표 득표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한방에 나가떨어진 것은 이인제 후보였습니다.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김대중 후보와 팽팽하게 접전을 벌이던 이인제 후보는 ‘경선불복’이라는 언론보도 ‘한방’에 치명타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인제 후보는 ‘경선불복’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한 데다 ‘철새’ 이미지까지 겹쳐 몇 차례 도전이 모두 실패로 끝나고 정치에서 쓸쓸히 퇴장했습니다.
2002년의 한방은 ‘노풍’이었습니다. ‘국민경선’이라는 대박 상품과 ‘노사모’라는 자발적 지지자들의 힘이 불러일으킨 ‘노풍’은 당내 경선에서는 ‘이인제 대세론’을 꺾고, 본선에서는 ‘이회창 대세론’까지 꺾었습니다. 그러나 노풍만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월드컵풍’을 등에 업은 정몽준 의원과의 극적인 단일화로 겨우 이길 수 있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병역비리라는 한방에 뼈아픈 패배를 당했던 이회창 후보는 2002년에는 ‘빌라 파문’, ‘원정출산 파문’, 박근혜 의원 탈당(물론 선거 전에 복당했지만) 등의 악재가 겹쳐 거듭 고배를 마셨습니다. 세 번째 도전한 2007년 대선에서도 초라한 성적으로 패배함으로써 정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 민주통합당 후보는 압도적으로 앞서가던 이명박 후보를 한방에 거꾸러뜨리기 위해 ‘도곡동 땅’ 문제와 ‘BBK 주가조작사건’을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경제를 살려낼 거라는 기대로 이 후보의 문제점에 눈 감아왔던 지지자들에게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문국현-이인제 후보와의 단일화라는 한방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각 정당과 후보들은 ‘한방의 추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선거는 아직도 석 달 이상 남았고, 우리 정치가 워낙 역동성이 강하고 변수가 많아 국면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헛방에 그칠 가능성이 큰 한방보다는 시민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시민들이 바라고 실천가능한 약속이 더 효율적일 겁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