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도선의 시와 달빛②] 낮잠 자는 사이 “수박을 그렸는데”
보랏빛 가지 곁에 방아깨비 여치 개미 논다
수박을 그렸는데 생쥐 와서 파먹고
양귀비 손 한번 못 잡아보고 나비에게 쫓겨난 뱀
외로운 맘 숨겨보려 풀벌레 불러놓고
따스한 햇볕 아래 맘껏 풀어 놓았더니
저 닭이 먼저 다가와 벌레들을 쪼아 먹네
꿈인가! 시에스타 HERMES 찻잔 그림
초충도가 분명한데 누구의 손길인가
보이지 않는 예술혼 바람만이 스쳐 간다
♣ 이 작품은 쓰게 된 동기가 있다. 25년 전 모 백화점 명품관에 진열된 찻잔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고가(高價)의 HERMES 찻잔 문양이 신사임당의 초충도 그림과 너무 유사했다.
몇 개 월간 돈을 모아 그 찻잔을 2세트 샀다. 비싸다는 핑계로 전시만 해둔 찻잔. 글을 다시 쓰게 되면서는(20년 쉬었음) 이 잔에 커피를 담아 마셨다. 어느 날 햇살 드는 창가에서 차를 마시다가 잠깐 잠들었는지 꿈에 나비 방아깨비가 내 손등에 앉아 노는데 벌이 와서 톡 쏘는 바람에 놀라 깼다.
찻잔이 엎어졌는데 잔 밑창에 siesta라는 문양이 확 눈에 들어왔다. 순간 묘했다. 단숨에 써 내려갔다. 1연은 ‘초충도를 묘사’ 2연은 ‘사임당과 내 심경’을 3연은 ‘지금 이 현실’을 그대로 적었다.
siesta는 유럽지역에서 낮잠을 말하는데 이 찻잔의 陶器 명이 낮잠이란 말인가? 우연치고 의도된 기분이었다. 사임당 그림이 프랑스에 알려졌을까? 동서양의 시선이 500년 전이나 현대가 같을 수 있다는 점. 이것이 예술이다. 시공간을 뛰어넘은 예술혼을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