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 최고 백신 ‘걷먹웃자’(걷고·먹고·웃고·자고)를 아십니까?

걷고 또 걷자

WESS···걷고(Walk), 먹고(Eat), 웃고(Smile), 자고(Sleep)

[아시아엔=천비키 한체대 멘탈코치·본명상 코치] “천비키, 다 내려놔 봐.” 맘속에서 이런 울림이 들려왔다.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인가? 바로 내 생활방식이었다. 멘탈코치와 명상가로 치열하게 살아오면서 몸의 에너지가 고갈돼 버렸다.

과거 앓던 지병도 다시 고개를 들어 결국 휴식과 치유를 위한 결단이 필요했다. 우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SNS부터 끊었다. 그리고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자연치유를 하는 건강원을 찾았다.

새해 시작하자마자 남녘의 한 기관에서 3주간 엄격한 식이요법과 강의, 그리고 다양한 건강요법으로 체계적인 디톡스(detox)의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다행히 시설도 좋았고 함께 지낼 룸메이트도 필자가 ‘친엄마’로 부를 정도로 좋은 분이었다.

적이 안심이 되었다. ‘이곳에서 계획대로 머물면 건강이 좋아지리라’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인가? 일주일 갓 넘기면서 행정당국에 의해 해산조치가 내려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보건복지부에서 파견된 공무원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하더니 코로나19가 우려된다며 모두 떠나기를 바랐다. 대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사실 이곳에 들어온 대다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우스갯소리로 “코로나로 죽으나 여기서 죽나 매한가지”라며 농담도 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청천벽력 같은 “떠나라!” 소리에 막막했다.

그러나 간절함이 하늘에 연결되었는지 우여곡절 끝에 나는 충청도 지역의 한 가정을 소개받았다. 그곳을 소개한 분은 디톡스를 전문적으로 수행해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운영하는 부부 내외가 심성도 고와서 마음 편히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룸메이트에게 “그 가정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가정집이라고 알고 도착한 곳은 컨테이너 박스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해 살림집처럼 사용하는 곳이었다. 앞에는 공사하다 버려진 깨진 양변기, 고무호수 등 폐기물들이 모래더미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집 뒤와 옆에는 오래 방치된 우중충한 회색빛 슬래브 지붕의 창고들이 있었다. 함께 온 룸메이트 어머니는 “여기서 디톡스를 하란 말이냐”며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 오자고 제안한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디톡스 프로그램을 진행해 줄 안주인은 내가 오히려 도움 줘야 할 것같이 허약해 보였다. 병증으로 눈도 잘 보이지 않는다 했다. 집안 구석구석 물건들이 쌓여 있고, 설상가상으로 방에는 문짝도 없었다. 화장실은 문 대신 커튼이 쳐져 있었으니 더 무슨 말을 하랴. 내외분은 우리를 환영하면서도, “이곳에서 할 수 있겠느냐”며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디톡스 프로그램엔 매일 관장을 해야 하는 만큼 좁은 공간에 남성이 같이 있는 건 영 맞지 않았다. 부군은 우리가 있는 2주 동안 집밖에서 잠자겠다는 ‘배려’까지 해주었다.

소개해준 분의 체면과 내외분의 맘 씀씀이로 선뜻 내키진 않았지만 일단 머물기로 하였다. 룸메이트와 나는 첫날밤, 커튼 없는 창과 컨테이너 박스에 스멀스멀 차오르는 한기를 막기 위해 테이프를 창틈에 붙이고,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첫밤을 설쳤다.

이태석 신부와 아프리카 어린이친구들. 그들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튿날 동이 트고, 안주인과 마주하면서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건 또 뭔가? 안주인은 자신의 몸도 성치 않은데, 마치 나이팅게일 화신처럼 우리를 진심으로, 온 맘을 다해 돌봐 주었다. 그뿐 아니다. 그녀가 뿜어내는 평온함과 수용력은 말 그대로 ‘짱’이었다.

존재 자체가 사랑이었다. 부군 역시 순수한 영혼 그 자체였다. 룸메이트와 나는 이 치유프로그램의 강력한 디톡스인 관장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외부에 머물기로 한 부군에게 집에 같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렇게 살을 부딪치고 한솥밥을 먹는 가족공동체가 돼 버렸다.

남들이 들으면 ‘유치 개그’ ‘썰렁 개그’라 웃지도 않을 얘기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 사람이 말하면 웃음을 터트렸다. 소녀처럼 산책하며 떠들고, 먹으면서 대화하고, 걷기도 하고, 기도도 함께 드렸다. 아침저녁으로 체조를 하며 서로 안마를 해주었다. 단순히 먹고 자는 공동체에서 치유와 따뜻함이 넘치는 ‘영혼의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2주가 훌쩍 지나 짐을 쌀 무렵이 되었다. 룸메이트였던 어머니는 “떠나기 싫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나는 한술 더 떠 주인 내외께 “몇 주 더 있어도 되겠느냐”는 제안까지 했다. 놀랍게도 어머니와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그곳에 정을 붙였고, 자연히 치유도 얻었다.

쓰레기더미 같은 집구석, 변변히 실천도 못한 디톡스 프로그램, 새우잠 자듯하던 잠자리에 목욕 한번 못한 환경에다 체조 때마다 좁은 공간에 몸이 부딪칠까 조마조마했던 그곳에서 어떻게 치유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렇다. 바로 마음의 안정이었다. 몸을 부대끼며 주고받은 온정과 사랑 덕분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우리의 본성은 관계의 사슬 속에서 성장하고 자신의 존재도 드러낸다. 관계 맺기를 통해 연민과 공감, 자비와 감사함을 지니며 자연스레 치유가 일어난다.

코로나19로 방역과 위생이 건강수칙 제1호다. 접촉과 만남의 억제와 거리두기가 일상이 돼버렸다.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위생 면역뿐 아니라, 관계가 주는 치유력도 중요하단 사실을 잊으면 곤란하다. 외로움과 단절감, 고독감은 면역력도 낮추고, 심혈관 질환 등을 유발하며 심지어 자살을 부르는 우울증의 원인이 된다.

물리적 만남을 자제해야 하는 코로나시대, 마주하는 이들에게 미소를 짓는 것, 따뜻한 전화 음성,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아끼지 않는 것, 이처럼 사소한 마음 씀씀이가 코로나 쓰나미를 이겨낼 ‘진짜 백신’ 아닐까? 그렇다. 먹고 자고 일하고 웃고, 이 4가지만 제대로 한다면 코로나 못 이겨낼 것도 없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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