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시진핑 ‘항미원조’ 발언과 왕이 방한 그리고 ‘장진호전투’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0월 23일 항미원조 참전 70주년 기념식에서 6·25전쟁을 “미 제국주의 침략 확장을 억제한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후 한달 지나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방한했다. 그의 방한 기간은 1950년 장진호전투 시기와 겹친다.
군인들에게는 동장군(冬將軍)이 그냥 말이 아니다. 영하 40도가 되면? 1950년 11월 27일부터 17일간 미 해병 1사단이 장진호전투에서 당했던 실화다. 이 가운데 중공군 4개 사단이 격돌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과 1941년 히틀러의 독일군이 당했던 참화의 재현이었다.
이를 돌파한 것은 사단장 스미스 장군의 통솔력이다.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악전고투하던 사단장은 11월 27일 후퇴할 것을 결심하였으나 ‘후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해병대에는 그런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미스 장군은 적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돌파를 위하여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 방향이 후방이었을 따름이다. 미 해병대의 철수를 막기 위해 송시륜(宋時倫) 중공군 8병단 사령원은 4개 사단 외에 5개 사단을 추가로 투입하였다.
미 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전진하여 하갈우리에 이르자 교량이 폭파되어 있었다. 스미스 장군은 공군에 다리를 투하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수송기로 40톤에 달하는 M-2 조립교를 낙하하여 1만명의 병력과 1천대의 차량이 건널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작전을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세계에서 미군밖에 없다. 미군의 물자 동원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후방으로의 전진은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대부분이 동상환자였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자를 부러워하는 형편이었다. 그 혹한 속에서 후퇴하면서도 이를 증언하는 통신부대의 세세한 사진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놀랍다. 이것은 난관 속에서도 각 부서가 모두들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부전선에서 해병 1사단이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서부에서는 육군 2사단이 ‘인디안 태형’을 당했다. 일본 도쿄의 유엔군사령부에서 이 상황을 접하는 맥아더 원수도 거의 공황상태였다. 해병대만이 스미스 장군의 통솔로 이 절망적 상황을 가까스로 벗어났다.
미 해병대 손실은 전사 718명, 부상 3504명이었다. 중공군은 전사 2500명, 부상은 그 다섯배였다. 해병 1사단이 중공군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유엔군은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해병 1사단에 이어, 미 7보병사단, 국군 수도사단, 미 3보병사단이 철수했고, 차량 1만7천대, 탄약 9천톤 등 35만톤의 장비를 구출하였다.
흥남 철수를 통해 십만의 피난민이 북한을 벗어났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렇게 넘어온 부모 가운데서 태어났다. 탱크와 대포를 모두 내려놓고 14000명의 피난민을 구조한 빅토리아호 선장과 10군단 통역 현봉학은 영화 <국제시장>에 그려져 있다. 흥남 철수작전을 엄호한 김백일 장군의 공훈도 잊을 수 없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장병들이 모이는 Chosin Few는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Chosin Few는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 모임으로 1983년 발족되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전우”라는 뜻으로 장진호 전투의 생존용사 가운데 4000여명이 47년 만인 1997년 비로소 미국 원호청의 동상 후유증 보상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한 미군의 희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