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색계’와 중국의 굴욕, 그리고 굴기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상해사변’ 후 일본 해군이 진주한다. 영화 <색계>(色戒)는 당시를 그리고 있다. 점령된 중국인민의 굴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上海와 중경重慶에서 겪던 곤욕을 단편적으로만 들었을 뿐이다.
1937년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에 들어간다. 1931년 만주사변은 본래 중국이 아니었던 만주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고구려 멸망 이래 바로 발해가 되었고, 뒤를 이은 요遙, 금金, 원元 등 새외민족塞外民族은 중국 본부 통치에 주력해 만주를 제대로 통치하지 안했다.
한족漢族의 명明은 만주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고려 최영 장군의 요동정벌은 이때를 타서 만주를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반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예 나라마저 바뀌었다. 나라를 갓 세운 明으로서는 조선의 사대정책이 고마웠을 것이다. 淸이 들어서자 아예 만주를 봉쇄했다. 대신 한족이 대거 만주로 들어왔다.
만주국은 일본인 외에 만주족, 조선족, 몽고족, 한족이 합한다는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내걸었다. 20세기 중화민국과 중국공산당도 이 전략을 잇고 있다.
1937년부터 일본의 중국 본부에 대한 침략이 이루어진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만주사변과 달리 중국 본부에 대한 침략은 장기전이었다.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는 남경南京이었다. 남경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민간인 30만명을 살해하는데 오늘날 일본이 비난을 받고 있는 남경대학살 이다. 독일의 유태인 학살과 같은 용서할 수 없는 인륜범죄였다. 그러나 이는 전범재판에서 올바로 처리되지 않았다.
만리장성 이남 대부분의 장성은 진秦이 아니라 명明대에 구축된 것으로 쫓겨간 몽골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공은 한족 외에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라고 하지만, 대부분 한족이고 나머지 5% 티베트, 위구르도 각각 수백만으로 충분히 나라를 이룰 만하다. 만주족은 백만 정도만 남아 있는데, 청이 선 후 중국 본부로 들어간 팔기八旗는 유모로 주로 한족을 썼기 때문에 만주어가 아예 없어졌다. 오늘날에 만주에는 백여만 만주족이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은 미국, 영국이 주로 일본과 싸운 전쟁으로 중국의 기여는 크지 않았다. 전쟁 후 바로 국공내전에 시달리고 1949년 10월 중국공산당이 성립되어서 전범재판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중 중국 인민의 피해는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받은 피해와 비등할 만큼 막대하다. 전후 장개석 덕분에 복수를 안 해서 일본인들은 무사히 돌아갔다.
1992년 일본이 중화민국을 버리고 중국과 수교한 것은 국제정치의 현실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미국이 대만관계법으로 대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적절치 않다. 21세기 들어 미국은 홍콩, 티베트, 위구르 인권문제로 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 주미 대만 대표부 대표가 참석했다. 미국이 대만을 민주주의 파트너로 인정한 것이다. 현재 중국은 티베트에 외국인 출입을 금하고 있으나 리차드 기어 등이 영화로 티베트를 소개하고 있다. 등소평이 대처 수상에 약속한 일국양제一國兩制에도 불구하고 홍콩에서도 보안법을 강행하는 것을 보면 중국이 민주화되기 위해서 백년은 걸릴 것이다. 도광양회에서 굴기로 급회전하는 중국의 앞날을 예의주시해야 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