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중공군 인해전술과 675년 나당전쟁의 매소성 전투
중공군은 군기가 강했다. 행군하다가 미군기가 날아와 은폐 엄폐할 시간이 없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서버렸다. 야영 중 불이 새어나오면 그대로 쏴버렸다. 본래 중공군 군기가 강해서가 아니다.
중공군 병사가 인간이 아니라 개돼지인 것은 유구한 역사다. 6.25전쟁 때 죽어가면서도 고지를 올라가는 인해전술이 가능했다. 이제는 중공군도 이런 생명 경시로 군을 운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군에도 오늘날은 상상할 수도 없는 즉결처분이 있었다. 1950년 7월 25일 분대장급 이상에 부여했다가 1년 후 폐지되었다. ‘국가 존망지추’(國家 存亡之秋)라는 것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청년들이 애국심으로만 고지를 올라간 것이 아니다. 올라가지 않으면 독전대(督戰隊)에 죽었기 때문에 올라간 것이다. 군대란 죽이지 않으면 죽는 곳이다.
중공군은 특히 유동전에 강했다. 군우리 전투, 장진호 전투, 현리 전투가 모두 그것이다. 침투하여 후방을 장악하고 측면을 돌아 포위하면 미군과 국군에 공황이 왔다. 중공군 팽덕회(彭德會) 등은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군을 이겨낸 백전노장이었다.
30대 한국군 장성들이 이기기 쉽지 않았다. 요새(要塞) 방어전에는 유동전이 필요 없었다. 백마고지 전투, 저격능선 전투에서는 장병들이 오직 결사의 투지로 이겨냈다.
자유당 정부에서 구타는 일상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 있었으나 이런 과정을 거쳐 군이 바로 잡아 나간 것이다. 해병대에서는 얼마 전까지도 장교들 사이에도 구타가 있었다. 장애물이 없는 개활지에서 총탄을 받는 해군 보병의 상륙작전 특성상 필요하다고 하는데, 타군은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하기 힘들다.
군법회의를 전시에도 민간법원에 둔다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 평시 전시가 구분되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 쿠바와 대적하고 있는 관타나모 기지의 해병대의 독특한 군사문화를 다룬 영화 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KBS가 한탄강에 관한 기록영화를 방영한 바 있다. 정부와 시민 노력으로 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예로 삼을 만하다. 경원선을 타고 연천에 가면 한탄강을 만나고 더 나가면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철원평야에 이른다. 모두 6.25전쟁 후 찾은 것이다. 전쟁 전 38선 이북에 있던 설악산을 전쟁 후 차지한 것과 같다. 한 치의 땅도 피로 찾지 않은 것이 없다는 백선엽 장군의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이다.
동두천과 전곡을 지나 38교를 건너면 675년 신라가 당을 마지막으로 몰아낸 매소성이 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말갈 기병 군마 3만3800마리를 노획하고 3만명분의 무기를 노획했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 일종의 미니 세계대전이었다. 살수대첩, 귀주대첩과 더불어 매소성 싸움도 가르쳐야 한다. 고려시대에 한때 황제를 칭한 때도 있었음을 가르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