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발자취 걷다②]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아시아엔=황효진 공인회계사, 인천도시공사 전 사장] 정약용 부모의 묘소가 있었던 충주 하담과 정약용의 6대 이상 선조의 묘소가 모셔져 있었다는 안산 선영도 찾았으나 두 곳 어디에서도 정약용의 선영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고, 천진암 성지 내 가르멜수녀원 뒤편 산을 오르고 나서야 이벽의 가족과 정약용 부모와 형제의 이장된 묘지를 볼 수 있었다.
정약용이 1801년 3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7개월 남짓 유배 생활을 했던 포항 장기읍도 한걸음에 달려갔다. 정약용이 17년 이상 유배생활을 한 강진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다녀오는 곳이었다. 금년 봄에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동백나무숲을 지나 비안개 가득한 만덕산 정상까지 올라가 정약용이 보았을 탐진 농가들을 조감하였다.
갈 곳 없는 정약용을 챙겨준 강진 읍내 노파의 주막집 사의재를 둘러보면서 정약용이 강진에서 낳은 딸 홍임의 숨결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고, 그 대신 김영랑 생가 뒤 우두산 정상을 거쳐 남당으로 내려오는 산 중턱에 있는 보은산방에서 정약용 부자기간의 정을 감지하였다.
이곳에서는 정약용이 큰아들 학연에게 주역을 공부시켰을 뿐만 아니라, 먼바다를 바라보며 흑산도에서 지내고 있는 지기(知己)이자 형인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자주 눈물을 훔치던 곳이기도 하다.
혜장선사가 마련해준 보은산방은 정약용이 강조한 인(仁)의 실천 덕목인 효(孝)와 제(悌)가 한데 어우러진 곳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정약용 형제가 눈물의 이별을 한 나주 율정마을을 찾아 나서지 않았겠는가?
정약용의 마음을 여행하다
지난봄부터 여름까지 틈난 나면 정약용의 발자취를 따라나섰다. 그가 쓴 시문집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나는 한때 정약용의 신유년 구사일생 ‘비책’에 대해 상처를 받아 고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토록 오랜 기간 버림받은 상황에서 어떻게 한결같이 선(善)을 추구하였는지를 보았다. 정약용은 사람은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성기호론(性嗜好論)을 이야기하면서도 물질에 현혹되는 인심을 억제하고 인의에 충실한 도심을 드러내는 데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다시 말해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정성을 다하여 하나로 하여야 진실로 그 중심을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하는 서경의 말에 충실했다. 게다가 상제(上帝)를 두려워 하고 고통받는 백성을 가까이했다. 오랜 기간 유배 생활을 하는 가운데 수기치인(修己治人) 하는 정약용의 용맹전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그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되살아나지 않겠는가?
나는 어느새 정약용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다. 이런저런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정약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했다. 이제 그의 마음을 여행하고 그의 일기를 직접 써 내려가고 싶어졌다.
정약용의 5대 후손이 정리한 <사암선생연보>와 조성을 교수가 펴낸 <연보로 본 다산 정약용>에 근거하고 또한 정약용을 빙의하여 써내려간 나의 ‘그의 일기’ 몇 대목을 올린다.
참고로 그의 일기 속에 나오는 정약용의 시는 송재소 선생의 <시로 읽는 다산의 생애와 사상>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혀 둔다
1801년 2월 27일
명례방에서 체포되어 의금부에 끌려온 지 이십일 가까이 되었다. 그동안 생사를 가름하는 추국이 여러 차례 있었다. 며칠 전 심의관 이병모로부터 ‘곧 백방(白放)될 것이니 식사를 많이 들고 자중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어떠한 처분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이 되자 시름이 깊어갔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의금부에 끌려온 지 19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밤 감옥에서 나왔으나 서용보의 주장 때문에 무죄로 석방되지 못하고 포항 장기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내가 암행어사로 있을 때 탄핵받은 서용보의 원한이 언제나 끝날지 모르겠다. 의금부 옥살이는 19일로 끝났지만 귀양살이가 19년으로 이어지는 소무의 운명을 겪는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내 그리는 옛사람 소무를 생각하네.
북해(바이칼호) 땅에 갇혀서도 비쩍 마름 면했다지.
소무는 십구년을 갇혀서 지냈는데
그의 일년은 나의 하루이니 기이하구나.
이제부터 힘을 쏟아 하늘 조화 보전하리.
내 옛 분을 그리다가 번뇌 괴롬 씻었다네.
1801년 3월 2일
한양에서 포항 장기로 유배를 떠난 지 5일째 되는 날이다. 군졸의 호의로 하담에 있는 선영을 들러 부모님 산소를 참배했다. 18년 전 아버지와 형님들과 함께 이곳에 와서 어머님 산소에 큰절 올릴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진사에 합격하여 효를 다짐했는데, 이제는 불효를 고하게 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더구나 나주 정씨 가문을 멸족의 위기에 빠뜨린 약종 형님은 참수되었고, 나와는 원수가 된 승훈 매형마저 능지처참이 된 사실을 고하려 하니 말문이 막혔다. 겨우 목숨을 건진 약전 형님은 추자도 유배길에 올라 있으니 돌아가신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하담 선영에서 참배를 마치고 얼마 가지 않아 두물머리 탄금대가 나왔다. 탄금대 열두문 절벽에서 투신 자결한 신립 장군이 부러웠다.
아버지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어머니 아시나요 모르시나요
우리 가문 갑자기 뒤집어져서
죽고 사는 문제가 이 지경이 되었네요
목숨만은 겨우 부지했지만
이 몸은 슬프게도 무너졌어요
자식 낳아 부모님 기뻐하시며
잡아주고 끌어주고 애써서 길렀는데
부모 은혜 갚으라 응당 말했지
이같이 꺾이리라 생각인들 했겠어요
이 세상 사람들께 바라는 바는
다시는 자식 낳았다 기뻐 말기를
1801년 3월 9일
드디어 동쪽 끝 장기현에 도착하여 노교(老校) 성선봉(成善封)의 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바람에 뒹구는 쑥대 덤불처럼 굴러굴러 여기까지 왔다. 바닷가 마을이라 밥상에 고기와 새우도 올라오고 뜰의 소나무와 대나무에서 일어나는 맑은 바람까지 즐길 수 있는 곳이니 임금님이 내려주신 탕목읍(湯沐邑)이 아니겠나 싶었다. 새삼 ‘온 땅이 진창인데 갈기 늦게 흔들었고, 하늘 가득 그물인데 경솔하게 날개 편’ 데 대한 회환이 스쳐갔다. 의로(義路)와 인거(仁居)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니던 젊은 시절의 방황에 자소(自笑)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목숨이 그물에 걸린 신세라는 사실에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그래도 궁한 길에 마음이 좁아질까 두려워 바다 쪽 사립문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역적 황사영의 흉서(凶書) 때문에 또다시 죽음의 문턱을 다녀왔다. 한때 서학을 같이 공부했던 악인 이 기경과 홍낙인이 나를 기필코 죽이겠다는 각오로 내가 흉서와 연루된 양 모함하였지만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분명 노론 벽파가 남인 공서파를 이용하여 정조 대왕이 총애한 남인 세력들을 제거하려는 사화(士禍)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내가 천주교를 떠났다는 사실만으로 정죄를 면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황해감사 정일원이 내가 곡산 도호부사로 있을 때 선정을 많이 베푼 사실에 근거하여 무죄 방면해야 한다고 임금께 상소하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고마운 일이다.
1801년 11월 21일
저녁 무렵 나주 율정마을에 도착했다. 내일 아침이면 약전 형님은 머나먼 흑산도로 떠난다. 이제 이별하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다. 두 눈만 말똥말똥 두 사람 말을 잃어 애써 목청 다듬지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 민족은 사색당파로 서로 죽이고 죽고 했는데…참 안타깝습니다.서로죽이고죽는 것이 인간인가 봅니다.아내가 정약용후손이라서 찾아 보았습니다.목민심서는 정치인의 바이블입니다.정약용 정약전 두형제의 귀양길이별이 목이 잠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