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길산·예봉산·예빈산 ‘목민심도’ 따라 다산 정약용을 만나다

광주 소내천에서 본 두릉 <사진 황효진 독자>

[아시아엔=황효진 회계사, 인천도시공사 사장 역임] 지난 한 달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며 정약용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한강 두미협을 따라 걸으며 여유당과 자찬묘지명이 있는 남양주 다산유적지를 우선 둘러보았습니다.

이벽의 강론이 펼쳐진 광주 천진암에서 신유사옥 때 희생된 정약용의 형 정약종의 부자 묘지(이벽의 묘지와 함께 이장되어 있습니다)도 찾았습니다.

여유당과 자찬묘지명 비석 <사진 황효진 독자 제공>

그리고 나서 검단산을 비롯해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 예봉산, 예빈산 등 ‘목민심도’를 따라 3주 연속 나홀로 등산을 하였습니다.

정약용 세거지(世居地) 두릉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예빈산에서 본 두릉<사진 황효진 독자>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4형제는 이데올로기(종교) 문제로 끝내 처형되거나 유배된 불운의 형제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 지금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나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교착 현상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이데올로기 문제에 얽힌 정약용 형제의 집안은 다산의 말대로 끝내 폐족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100년 이상 역사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운길산 수종사에서 본 두릉 <사진 황효진 독자>

나라가 이미 망한 일제시기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 일입니다. 그 대홍수로 그때까지 정약용의 후손들이 살던 여유당도 갑자기 불어난 물살에 흔적도 없이 휩쓸려 나갔습니다. 그리나 다행히도 정약용의 5대손 한 분이 여유당 다락방에 보관해 놓고 있던 <목민심서> 등 정약용의 책들을 뒷동산 정약용의 묘지까지 간신히 옮기고 난 직후 여유당 집채가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천진암 이벽(서학의 시조) 공부터 <사진 황효진 독자>

그리고 나서 그 후손은 묘지에 앉아 물에 젖은 책들을 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요? 정약용의 수십만 글자는 자신의 묘지 앞에서 100년 만에 부활하여 세상에 빛을 보았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정약용의 사상을 더 이상 옭아맬 권력이 나라가 망함과 동시에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약심로(思若心路) 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정씨 형제를 생각하며 걷는 마음의 길 참 행복했습니다. 거기 봄이 있었습니다.

예봉산에서 본 두릉 <사진 황효진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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