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발자취 걷다①] 운길산~청평사~명례방~만안교~황사영 토굴
[아시아엔=황효진 공인회계사, 인천도시공사 전 사장] 정약용의 발자취를 따라 지난 봄 남양주 덕소역에서 출발하여 운길산역까지 40여리에 이르는 다산길을 걸었다.
그 이후 최근까지 수 개월간 그가 생전에 머물던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마현 여유당 생가를 비롯해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운길산, 예봉산, 예빈산, 검단산은 물론 용문산 백운봉과 이벽이 강학을 한 것으로 유명한 천주교 성지 천진암 앵자봉을 오르기도 하고, 팔당댐 아래 두미협 강변을 걷기도 하였다.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을 유언처럼 쓰고 나서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녀온 춘천 청평사와 소양정은 자전거를 타고 둘러보고, 그가 말년에 열수의 시원지(始原地)를 찾아 나섰던 화천의 곡운계곡은 시외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다산이 15세에 혼인한 후 살았던 한양의 명례방(명동) 주변을 서성이고, 그가 과거공부를 하였던 전남 화순의 동림사터와 서울의 봉은사도 잊지 않고 다녀왔다. 다산이 1783년 경의로 진사에 합격한 후 정조와의 풍운지회(風雲之會)가 있은 다음에도 성균관 유생을 중심으로 이념(서학) 지하 서클 활동을 하던 곳인 김범우의 집터와 전태일기념관 앞 수표교 이벽의 집터를 자주 걷기도 했다.
현재 명동성당 자리로 알려진 김범우의 집터는 정약용을 비롯한 정약전, 이벽, 권일신, 이승훈, 이존창 등 성균관 유생들이 서학 교리를 공부하다가 형조 군졸들에게 발각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간 을사추조적발사건의 현장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 자리는 신서파의 존재가 최초로 조정에 알려진 역사적인 곳이었다.
개인적으로 그곳은 1979년 10·26사태 직후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시국선언대회에 참가했다가 현장을 급습한 형사에게 목덜미를 잡히기 직전 탈출하여 청계천 방향으로 정신없이 도망치던 곳이기도 하다.
정약용이 1789년 대과에 합격하기 전까지 6년 동안 ‘포의(布衣)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유생으로 출입했던 성균관과 벼슬살이 후 정조로부터 막걸리 한 사발 하사받고 불취무귀(不醉無歸) 하던 창덕궁 내 부용정을 찾았다. 거기서 단꿈을 꾸고 있는 정약용을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창덕궁 내 숙장문 앞뜰 국청장 앞에 섰을 때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배교 입증은 물론이고 한때의 천주교 동지를 원수로 고발하면서까지 살고자 했던 한없이 나약한 인간 정약용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날 그 마음의 상처를 평생 짊어지고 산 그에게 권위주의 정부 시절 청년기를 살았던 한 사람으로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아낌없이 전하고 싶었다.
정약용의 사환기(仕宦期) 전성시대를 상징할 만한 수원 화성과 사도세자와 정조의 묘가 있는 융건능을 수차례 방문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는 득의에 찬 정약용을 다시 만났고,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위해 화성으로 가는 길을 정비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경기 감사 서용보가 교량 공사를 하다 암행어사 정약용에게 탄핵당하는 빌미를 제공한 안양 만안교를 우연히 발굴(?)하여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정약용이 대과에 급제한 직후인 1790년 초 문체 문제로 10여일간 첫 유배생활을 한 해미읍, 1791년 정약용이 천주교를 떠날 결심을 하게 만든 제사 거부 사건이 일어난 진산 성당, 충청권의 천주교 선교에 헌신한 이존창의 여사울 생가터, 천주교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도가 죽어간 공주의 황새 바위, 황사영이 토굴에서 천주교 탄압을 고발하는 백서를 쓴 배론 성지 등 정약용과 관련된 충청권 천주교 성지를 틈틈이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의 본거지인 양평의 양근 성당, 죽는 순간까지 천주교를 배교했다는 이유로 천주교인들 사이에서조차 버림받아 그의 여종이 겨우 시신을 수습하여 묻었다는 이승훈의 무덤이 있는 인천 남동정수장 거모산 등 곳곳에 믿음의 피가 뿌려진 십자가의 길로 다니며 뜻하지 않은 성지 순례를 하였다.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 밀입국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홍성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진정한 학자로 사숙했던 성호 이익과 그가 태어난 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와의 인연을 만든 곳이 있었다.
1795년 성호 이익의 직계 후손들과 함께 성호 이익의 문집을 편찬한 공주의 봉곡사와 사도세자가 영조를 따라서 온양 행궁에 왔다가 활쏘기 연습을 한 후 그곳에 홰나무를 심어놓은 것을 기념하는 영괴대(靈槐臺) 두 곳이 그러한 곳이다.
공주 봉곡사에서는 정약용의 지적 자만을 볼 수 있었다면 온양 영괴대에서는 사도세자를 통해 정조의 마음을 사는 ‘눈치 빠른’ 정약용을 만날 수 있었다. 금정 찰방 시절 정약용이 온양 행궁에 들렀을 때 그는 사도세자의 활터가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음을 보고 이러한 사실을 정조에게 직보하였고, 정조가 어명을 내려 사도세자를 기념하는 영괴대를 즉각 설치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