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인사···“아플 때 우는 건 3류, 아픔을 즐기는 게 1류 인생”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이제 80여일 후면 총선이 다가온다. 나야 원래 중도(中道)를 지향하는 사람이라 객관적으로 총선을 바라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걱정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 덕화만발 가족 중 한 분은 자유한국당 후보로 경선에 나선다.
또 한 분은 해군제독 출신으로 정의당의 ‘국민안보특별위원장’으로 영입되어 비례대표로 출사표를 던졌다. 어쨌든 두분 다 ‘덕인회’ 중심인물이라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꼭 당선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옛말에 ‘질풍지경초’(疾風知勁草)라는 말이 있다. <후한서>(後漢書) ‘왕패전’(王覇傳)에 나온다. 광무제(光武帝) 유수의 말에서 유래한 ‘질풍지경초’는 역경을 겪어야 비로소 사람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광무제 때 명장 왕패(王覇)는 영천(潁川)의 영양(潁陽) 사람으로 아버지가 군의 결조연(決曹?)을 지냈으며, 왕패 역시 젊어서 감옥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를 지냈다. 하지만 그는 관직에 불만이 많았다. 왕패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를 장안(長安)에 보내 공부를 하도록 해 주었다.
후한(後漢)의 제위를 찬탈하고 신(新)을 세운 왕망의 개혁 정치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사회경제가 피폐하게 되자, 각지에서 왕망 정권에 반대하는 반란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양(南陽) 출신 호족으로 한 왕조의 핏줄인 유연(劉縯)과 유수(劉秀) 형제들도 한 왕조의 부흥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훗날 광무제가 된 유수가 영천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왕패는 빈객(賓客)들을 거느리고 와 유수를 만나 말했다. “장군께서 일으킨 것은 의로운 군대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역량을 알지 못하지만 모두 장군의 명성과 덕망을 우러르고 있으며 장군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유수가 말했다. “내가 꿈꾸었던 것은 어진 인재들과 함께 공업(共業)을 이루는 것이었소. 어찌 다른 뜻이 있겠소?” 이렇게 하여 왕패 등은 유수를 따라 나서게 됐다. 그 후 곤양(昆陽)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왕패는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에게 유수를 도와줄 것을 청한다.
그의 부친이 말한다. “나는 이미 늙어서 군대 생활을 이겨 낼 수 없으니 네가 가서 힘이 되어 주어라.” 왕패는 다시 유수를 따라 낙양(洛陽)으로 쳐들어갔다. 유수가 대사마(大司馬)가 되자 왕패를 공조영사(功曹令史)로 삼아 하북(河北)으로 건너가 큰 공을 세운다. 이때 왕패를 따랐던 수십 명이 몰래 대열을 떠나기 시작하였다. 유수는 개탄하며 왕패에게 말한다.
“영천에서 나를 따랐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그대만이 남았소. 우리 계속 노력해 봅시다. ‘세찬 바람이 불어야 강한 풀을 알 수 있는 것’이오.(?從至洛陽. 及光武爲大司馬, 以?爲功曹令史, 從度河北. 賓客從者數十人, 稍稍引去. 光武謂?曰, 潁川從我者皆逝, 而子獨留. 努力. 疾風知勁草.)”
그렇다. 세찬 바람이 불 때라야 강한 풀을 알 수 있다. 어렵고 위험한 처지를 겪어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우리네 인생은 역경과 난관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 세상은 염량세태(炎?世態)라서 잘 나갈 때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지만 몰락할 때는 썰물처럼 빠져 나가기 마련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보면 공자의 이런 말씀이 적혀 있다.
세한연후歲寒然後 송백지후조야知松柏之後彫也(날씨가 추워진 후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
마찬 가지로 집안이 가난할 때라야 좋은 아내가 생각난다. 그리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라야 충신을 알아볼 수 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더 멀리 퍼뜨리려면 종(鐘)이 더 아파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아플 때 우는 것은 3류이고, 아플 때 참는 것은 2류이며, 아픔을 즐기는 것이 1류인생이다.”
무릇 크고자 하는 사람은 아파야 한다. 고통 없이 영광은 없다. 그래서 결심은 특이하게 하고, 처신은 평범하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