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총선’ 여야 후보만큼 중요한 유권자 ‘안목’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보시공덕(布施功德)이란 말이 있다. 보시란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는 수행의 결실과 함께 구제받지 못한 세상의 모든 유정 물(有情物)을 구제해 준다는 이타(利他)의 서원(誓願)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반야(般若)의 지혜를 떠나서는 올바른 보시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한다. 반야에 입각한 보시는 주객이 분리된 입장에서 구축되는 의도가 아니라 분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보시는 현실사회 속에서 자비로써 작용되어야만 하며 사회에 대한 봉사활동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공덕(功德)은 보시(布施)·지계(持戒)·선정(禪定)을 통해서 쌓는다. 그러므로 공덕은 보시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공덕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질 수 있다고 한다. 불가(佛家)에서는 남을 위해 나를 희생하고 자신이 힘들여 쌓은 공덕을 남에게 돌릴 줄 아는 보살(菩薩)을 이상적인 불자의 모습이라고 본다.
옛날 어느 큰 절 앞에는 항상 절에서 법회(法會)를 하는 날이면 아침 일찍 절 입구에 초라한 거지 한 사람이 구걸을 하는 것이었다. 그 거지는 매일 절을 찾아 들어가는 신도들을 향하여 “한푼만 보태 줍쇼!” 하고 사정을 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꽤 시일이 지난 어느 날, 그 절에서는 관음전 낙성식이 있었고, 그 날은 새로운 주지스님이 소임을 받고 그 절로 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주지스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낙성식 겸 주지 스님이 부임하는 날, 항상 절 앞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가 법당 안으로 들어서자 중들은 나가라고, 마구 내쫓는 것이었다.
그러자 거지는 관음전 앞 땅바닥에 주저앉아 계속 한 푼만 보태달라고 구걸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동냥을 주기는커녕 자리를 슬금슬금 옮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화를 내며 나가라고 고함쳤다.
이윽고 행사가 진행 되는데 새로 오신다는 주지스님은 모습이 보이지 않고, 많은 신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지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앞으로 나가더니 법석에 앉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누가 저 사람 좀 끌어내라”고 고함을 치며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거지가 법석에 앉아 요지부동의 자세로 대중들을 향하여 일갈했다.
“이 중에 참불자 누구인가? 이 중에 바른 눈 가진 자 누구인가? 이 중에 보시바리밀을 하는 자 누구인가? 이 중에 육바라밀을 배운 자 누구인가?” 그리고 말을 잇는다.
“내가 이 절에 소임을 맡은 새로운 주지올시다. 여러분들이 과연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는가? 여러분들은 차림새로 사람을 판단하면서 참사람 보는 지혜의 눈도 못 뜨고 무슨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면서 복을 구한다는 말인가? 여러분은 부처님과 거래를 하러 오는 사람이지 어떻게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부처님께 절하면서 뭐, 뭐 잘 되게나 해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 거래를 하자는 행위다. 내가 오늘 찾아와 기도했으니 내가 소원하는 것을 들어 달라고, 부처님과 거래를 하려는 자가 어찌 불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는 말문을 이어갔다. “나는 달포 가까이 이 절 일주문 앞에서 여러분들에게 거지 행색을 하고 구걸을 해보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돈 한푼 기꺼이 내놓은 사람이 없었다. 복 짓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부처님 전에 찾아와, 잘 되게만 해달라고 하니 그게 거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그런 조건부 거래를 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전생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쌓인 업보를 참회하라 하셨거늘 그 일은 내팽개치고 그냥 잘 되게만 해달라고 해서는 불자가 아니다.”
보시는 이종시(二種施)·삼시(三施)·사시·팔종시 등으로 분류된다. 이종시는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로 나뉘고, 삼시는 재시와 법시와 무외시(無畏施)로 나누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삼시 설’을 널리 채택하고 있다.
삼시란 무엇인가? 첫째, 재시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능력에 따라서 재물을 베풀고, 스스로 인색하고 탐욕한 생각을 버려서 구하러 온 사람으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끔 하는 것이다.
둘째, 법시로 중생이 진리를 구하러 오거든 자기가 아는 대로 좋은 방편을 써서 이야기해 주되, 명예나 이익이나 존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수도와 구제를 위하여 이익을 줄 수 있게 되기만 염원하면서 행하는 것이다.
셋째, 무외시는 어떤 사람이 재액(災厄)을 만나고 어려운 일을 당하여 공포와 위험 앞에 놓여 있을 때 자기가 스스로 그 난(難)을 받아 감당하고 그 사람을 공포 속에서 구출해 내어 평화와 안전을 베풀어주는 보시다.
이렇게 삼시는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음식시(飮食施), 가난한 이에게 재물을 주는 진보시(珍寶施), 정법(正法)의 수호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신명시(身命施)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시에는 보시하는 이, 보시받는 이, 보시하는 물건이라고 하는 삼륜상(三輪相)이 없어야 한다. 이 삼륜의 상을 마음에 두는 것을 유상보시(有相布施)라고 하는데 이는 참다운 보시가 아니다.
그러니까 유상보시는 우리가 과수(果樹)를 기를 때, 과수에 거름을 한 후에 거름을 위에다가 흩어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위에다가 흩어준 거름은 그 기운이 흩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보시는 거름을 준 후 흙속에 거름을 묻어주는 것과 같아 그 기운이 오래가고 든든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보시는 꼭 재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육신·물질의 세 방면으로 하면 된다. 새해 각자 자신이 믿는 방식대로 보시를 하며 이웃을 생각하고 도우면 이 얼마나 복된 일일까?
다만 보시공덕을 쌓되 기복(祈福)의 마음을 버리고 오직 무상보시를 행하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