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문화 3.0] ④ “붉은색의 수난과 영광”

북유럽인은 대개 청색 계열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이는 길고 긴 겨울, 그리고 밤이 이어지는 가혹한 환경의 결과다.

색채 이데올로기의 극복

한국인의 색채 감각에 대하여 생각해본다.?시각적 지각에서 색채에 대한 지각은 매우 직접적이며 구체적이다. 빛과 색채를 구분하는 일은 최근에서야 구체화되었다. 그것은?컴퓨터의 보급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 우리의 색감각을 알아보자. 한국인의 색지각 양식은 인류생태학적 관점과 역사심리학적 관점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인류생태학적 관점은 대략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구분된다. 유럽의 예를 들면 이해가 쉽다. 북유럽인들은 청색계열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들의 눈동자는?초록색, 청록색, 파랑색 등으로 다양한데 주로 갈색 눈동자를 가진 한국인들에게는?신기하기만 하다.

갈색 눈에는 멜라닌 색소가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이 색소는 강렬한 태양으로?만들어진다. 그런 까닭에?더운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많이 분비되게 된다. 즉 흑인들이 검은 피부를 가지게 된 것은?이 색소 때문이다.

반대로 북유럽인들을 비롯한 북쪽 계통의 사람들은 이 색소의 분비가 적어 투명에 가까운 피부를 갖게 된다. 북유럽인들 만큼은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흰 피부를 가진 이유도 북쪽 계통이기 때문이다. 몽골을 비롯한 여타 북아시아인들 피부 역시 흰 편이다.

북반구의 자연환경은 가혹하다. 길고 긴 겨울을 견뎌야 한다. 깊고 푸른 밤(deep blue night)이란 말이 있다. 밤에는 파장 때문에 어두운 청색 계열의 광선이 이어진다. 새벽은 늘 푸르스름 하지만 저녁놀은 그 반대다. 그들은 푸른 색 계열에 익숙한 반면 빨강 계열에는 본능적 거리감을 느낀다. 따라서 북유럽인은 강렬한 태양빛에 노출되면 어쩔 수 없이 보호장치를 해야만 한다. 그중 하나가 선글라스다.?선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눈을 상할 수 있다.

한국인 역시 북아시아 계열이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선호하는 색상이 다르다.

한국 절의 단청은 청색 계열이 많이 사용된다. 다른 불교국가들의 단청과 매우 다른 색채 적용이다.

전통적 사찰을 보자. 우리만의 독특한 색상 장식이 적용되고 있는데 그것을 ‘단청(丹靑)’이라 부른다. 단청은 문자 그대로 붉은 것과 푸른 것이다. 붉고 푸른 색상들로 절의 처마 밑을 장식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청색계열의 사용이다.

이에 비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의 절에서는 단청 색이 다르다.?붉은 색 위주로 사찰을 단장했다. 청색의 선호도는 북쪽으로 갈수록 우세하다. 우리의 색동문양 역시 푸른색 계열이 많은데, 이와 유사한 모습이 티베트를 비롯한 위구르,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보인다. 모두 북쪽 지역이다.

다음으로 역사 심리학적으로 우리의 색상 선호를 살펴보자.

이런 관점에서 언급되는 주 색상은 바로 빨강색이다. 빨강색은 중국을 상징하는 색상이 되며, 아울러 일본을 상징하기도 한다. 중국인의 빨강색 선호는 모두가?안다. 그들의 적색은 이른바 금적(金赤)으로, 노랑색과 자주색이 완벽하게 들어맞아 이루어진 색상이다. 아주 진한 빨강색, 즉 핏빛에 가까운 모습이다.

반면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빨강색은 중국과 크게 다르다. 그들은 자주색에 가까운 적색을 좋아한다. 중국인의 적색이 호전적 느낌의 진한 계열이라면 일본인들의 적색은 만들어진 색상으로 가벼운 느낌이 든다.

한국을 둘러싼 이들 국가의 상징색은 모두 적색계열이다. 게다가 중국의 빨강색 집착은 한국인에게 어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조선왕조 시기에 마치 중국에 속한 듯했던 역사는 빨강색에 대한 거부감을 자연스럽게 조성했을 것이다. ‘백의민족’이란 말은 아마 그런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이어 조선왕조의 멸망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연결됐다. 일본 역시 또 다른 빨강을 내세우는 체제였으니 우리는 계속 이 색상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45년 해방은 또 다른 색상의 전기를 이룬다. 공산주의의 등장이다. 북한 위주의 사회주의 정권, 그리고 그러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빨갱이라 불렀다. 적색 이데올로기의 시작이었다. 더욱이 이들이 일으킨 한국전쟁은 역사 이래 최대의 민족적 비극을 가져왔다. 그러니 빨갱이를 좋아할 리 없다. 대한민국의 영원한 적은 바로 그 빨갱이들이 되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은 적색 이데올로기를 더욱 공고히 하는 사건이 되었다. 군사정권을 상징하는 군복색(초록색)은 적색과는 보색(補色)이다. 부족한 부분을 메워준다는 보색의 개념은 의학적이며, 생태학적 개념이다. 우리 눈이 보색 기능을 못하면, 중대한 결함이 된다. 색각과 색맹과 유사한 개념이다.

군사정권의 등장은 적색에 적개심을 가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녹색 선호 문화를 가져왔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거기에 푸른 농촌을 상징하는 새마을운동이 이어졌다. 당시 서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자. 거리에 굴러다니는 택시들의 색상이 모두 초록색 일색(一色)이었다.

이러한 사회 흐름은 컬러텔레비전의 등장과 더불어?바뀌기 시작했다. 즉 색채 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이때부터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선호 색상은 2000년대에 다가섰을 때 파랑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는 군사문화를 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한 자연스러운 변화였지만 적색에 대한 거부감을 완벽히 떨쳐낸 것은 아니었다.

2002년 월드컵의 붉은악마는 한국인의 적색 거부감을 해소시켰다. 젊은 세대가 드러낸 솔직한 감정이 색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게 한 것이다.

한국인이 적색 이데올로기를 완벽하게 떨쳐내는 계기는 의외로 싱거운 사건 때문이다.

바로 2002년 한국, 일본이 공동개최한 월드컵축구에서였다. 20~30대의 젊은이들이 모두 ‘붉은악마(red devils)’가 되었다. 그토록 저주했던 붉은 색이 전 국토를 뒤덮었다. 극적으로 붉은 색이 극복되는 순간이 연출되었다.

이제 붉은색에 대한 변화는 정치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군사정권과 인연이 있는 집권당의 색상이 변한 것이다. 파격적 변화였다. 파랑색 계열만 고집하던 정당에서 과감히 적색을 수용했다. 그 때문에 선거에서 승리를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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