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문화 3.0] ⑥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미국 렌셀래어 폴리테크닉(Rensselaer Polytechnic) 대학의 메리 스타니스제브스키(Mary Staniszewski) 교수는 ‘믿는 것이 보는 것(Believing is seeing)’이란 책을 썼다. ‘미술 문화로의 창조(Creating the culture of art)’라는 부제의 이 책은 아서 아사 버거(Arthur Asa Berger)에 의한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란 제목의 책과 역설적으로 반대되는 책이다. 후자인 아서 버거의 책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시각적 문화의 흐름을 일종의 미술이라는 관점으로 썼다면 메리 스타니스제브스키의 책은 그렇게 살펴본 역사에 중대한 반발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동문수학하며 장래가 촉망되던 학자였으나 일찍이 세상을 뜬 박이소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번역서의 제목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이다.
이 책의 도입부분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미지 또는 장치들이 나타난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아담의 창조’, 앞서 소개했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베르사이유 궁전, 기자의 피라미드, 니케상, 와또(J-A. Wateau)의 ‘시테라 섬으로의 순례’, 인도의 시바상, 림부르크 형제의 15세기 세시풍속도, 아프리카 가봉의 제사의식용 가면, 중국 귀부인도, 그리고 모나리자까지…결론은 이들 모두 미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역시 앞서 소개한 마르셀 뒤샹의 모나리자 그림을 고친 ‘L.H.O.O.Q’,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뒤샹의 ’샘‘, 몬드리안의 ’회화 1‘, 존 허트필드의 ’만세, 버터가 모두 사라졌군‘이란 풍자적 포스터,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 인터내셔널 기념비 모형‘, 로버트 스미슨의 대지 예술인 ’나선형의 둑‘, 아드리안 파이퍼의 설치미술 ’구석에 몰려‘, 신디 셔먼의 자전적 영화 패러디 사진인 ’영화 장면‘들 에바 헤세의 ’우연‘, 에드워드 스타이첸의 ’로댕의 발자크‘, 잭슨 폴락의 회화, 외젠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러스의 죽음‘, 조셉 코수스의 관념회화, 그리고 앤디 워홀의 ’네 명의 모나리자‘ 등을 들면서 이것들이 바로 미술이라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우리가 설정한 미술이란 것은 근대(modern era)에 해당되는 최근 200여 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시작은 1970년대 영국에서 비평가, 시인, 화가, 소설가로 유명했던, 즉 모더니스트로 불려 마땅한 존 버거(John Berger)의 이론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그의 명저 ‘보는 방법(Ways of seeing)’에서 과거의 모든 시각적 결과물들이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어떻게 보여져야함을 규정한 것이라고 언급한다. 이리하여 18세기 전만해도 시각문화를 다루는 제도들은 오늘날과 매우 달랐고 어찌 보면 전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때까지 우리가 소위 미술이라 불렀던 것들 모두 일상생활의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니스제브스키가 규정한 일상 속의 시각문화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이해가 어렵다면 우리의 전통으로 돌아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리나라는 기나긴 불교 신앙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이미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절집들에는 시각적 이미지와 장치들이 무척 많다. 경계를 나타내며 지금부터 경건한 공간에 진입하고 있다는 장치인 일주문, 해탈문을 비롯하여 부처의 분신이랄 수 있는 탑이 있다. 절집은 여러 용도에 의하여 건축되어 가지가지 모습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게 되는데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미륵불, 약사여래, 지장불 등 모두 나름대로의 모습들을 보인다. 어떤 규칙이 있다. 그런 규칙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존엄한 신분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외경심을 가진 신자를 비롯한 일반인들은 그렇게 규정된 대로 이들 이미지를 단순히 해석하면 된다.
이러한 방식의 이미지와 장치?해석은 서양미술(18세기 이전의 것으로 미술이 아니라고 하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상 숭배를 철저히 금한 초기 기독교는 점차 변질되어 많은 이미지들을 남겼다. 이것은 문자해독을 독차지 하며 특권을 지속하고자 한 귀족층의 의도와 맞아 떨어진다. 기독교 세계의 강화와 더불어 문맹 기도가 맞아 떨어지며 수많은 종교회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들 그림은 그려진 대로 믿어야지 다른 해석이나 이유 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의도한 고객(client)의 주문에 의해 화가나 조각가, 건축가가 그대로 그려진 작품들의 방식은 귀족이나 성직자의 초상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른바 지배자에 대한 존엄한 모습은 권위 유지의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타고난 자질을 가진 화가들은 이들 지배자들의 소유물과 다름이 없었고, 삶의 유지 보장, 나아가 생명의 담보는 그들 입맛에 맞는 이미지를 충실하게 만들면서 가능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시각이미지들을 현재 예술의 한 부분인 미술로 여길 수 없다.
아무튼 그러한 시기가 영원히 유지될 수는 없었다. 공교롭게도 19세기 사진술의 발명과 본격적 예술로서 미술의 탄생이 함께 이뤄졌던 것이다. 사진이 발명되면서 이제 지배자의 입맛에 맞게 똑같이 그려대는 화가의 입장은 흔들렸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지배자들은 더 이상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없는 시기가 되었다. 근대 시민사회의 대두와 함께 신흥자본가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는 작업을 갖거나 아직 남아 있는 귀족(sponsor)을 위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냉정하게 말해, 개성 있고 투자가치가 있는 작품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 귀족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면서 신흥브르주아를 함께 아우르는 작품을 만든, 어쩌면 지나치게 혁신적인 작업을 한 화가들이 고통을 겪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이 그들이다. 고객 취향에 어느 정도 부합하며 귀족 반열에서 잠깐 호사를 누린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달리 그 이후의 작가들은 무척 고통을 당했다.
결론은, 18세기 이전까지의 미술은 후원자와 고객에 해당되는 종교적, 정치적 귀족의 취향에 맞게 이루어진 용도로의 미술이었으니 오늘날의 디자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이래로 이루어진 시각문화의 1.0 시대는 이렇게 수 천 년을 이어온 후 19세기와 함께 막을 내렸다.